법관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성창호 판사를 둘러싼 논란에 부쳐

검토 완료

윤성환(hansa84)등록 2019.01.31 15:19
1월 30일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일명 '드루킹 사건'과 관련해 징역 2년의 실형 선고 직후 법정 구속됐다. 지난 2016년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가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음에도 현직 도지사라는 이유로 법정 구속되지 않은 사실과 비교해보면 김경수 지사의 구속이 대단히 이례적인 사태임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해당 판결을 선고한 성창호 판사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이와 함께 당장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정통성 또는 정당성을 향해 공격하고 나섰다. 자유한국당의 경우 일찍이 한나라당 시절부터 댓글조작 부대를 운영했다는 보도가 지난해 나온 바 있지만,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대응도 하지 않은채 "댓글조작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엄중한 사태"이며, "댓글조작으로 인한 2017년 대통령 선거의 정당성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인지하고 관여했는지 여부에 대한 국민적 의혹이 커지고 있다"라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사실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탄핵"을 운운했던 만큼, 이러한 반응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구속이 지닌 '예외성'과 해당 판결문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매체와 정치인, 관련 전문가들이 지적한 만큼, 이 글에서는 이러한 법리 관련 논의를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 사태를 둘러싸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공방과 관련해 일개 시민으로서 필자의 생각과 해석을 진술하고자 한다.

지금 자유한국당의 주장은 한마디로 법관의 판결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민주당을 향해선 '이중잣대'를 들이밀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자유한국당의 입장은 31일 아침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윤영석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의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김경수 그리고 드루킹의 댓글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일단 판단해서는 안 되고요. 철저하게 헌법과 법률에 기초해서 법리적으로 판단해야죠. 그래서 일단 사법부의 판단이, 1심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판단에 대해서는 저희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중략) 민주당에서 지금 어제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아마 짜맞추기 판결이다.' 하는 그런 식으로 이중적 잣대의 지금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지금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 성창호 판사가 징역 8년을 선고했을 때 민주당에서는 '아주 환영한다.' '판사를 존중한다.' 이렇게 아주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판사의 판결을 믿지 못하겠다.' '양승태 키즈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러한 이중적 잣대의 모순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중심을 지키는 그런 대통령의 모습 또 정부의 모습, 여당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위 발언과 관련해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박근혜 탄핵과 구속은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동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국회의 박근혜 탄핵소추안 통과부터 그러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이루어진 탄핵심판 소추위원 역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즉, 박근혜 탄핵과 구속은 결국 새누리당의 역할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다시 말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연인원 1,700만에 달하는 국민의 요구야말로 박근혜 탄핵과 구속의 결정적 계기였던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즉, 박근혜 탄핵과 구속은 대다수 국민의 뜻이자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움을 느낀 새누리당의 선택이 작용한 결과였으며, 이를 김경수 지사 구속 사태에 대한 이의 제기를 '입막음'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유한국당의 자가당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함께 법관의 판결을 과연 '절대화'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 이루어진 과거사 관련 사건의 재심 결과 그 당시의 판결과 전혀 다른 판결이 나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또 그러한 정치적 사건은 예외로 하더라도, 당장 '삼례 나라슈퍼 사건'과 같은 재심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법관과 법관의 판결이 그 자체 절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법관 역시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 속에서 법관의 최종판결에 불복할 방법이나 제도가 부재할 따름인 것이다. 작금의 사법농단 사태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법원이, 그리고 판사들이 조직적으로 재판을 거래와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게 사법농단 사태의 골자가 아닌가? 이는 법관들이 판결권이라는 권한 또는 권력을 자신들의 승진욕, 출세욕을 충족하기 위해 활용해왔음을 보여주는 사태라는 점에서 충격을 던졌다. 그리고 양승태는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미 MBC <스트레이트> 23회 '추적, 판사 양승태' 편에서 잘 보도한 바와 같이 양승태는 판사 시절이던 전두환 정권 당시(1986년)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조작 사건(제주 오재선씨 간접조작 사건)에 대해 권력의 입맛에 맞추어 징역 7년의 유죄를 선고했고, 마침내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권에 이르러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법관이 법을 때로 흉기로 활용할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법농단이 수면 위에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이탄희 판사의 용기있는 행동이 그 첫 출발이었지만, 역시 촛불혁명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만일 촛불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박근혜 정권 이후에도 보수정권이 들어섰다면, 지금처럼 사법농단이 제대로 언론지상에서 다루어질 수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이 상황, 즉, 사법부와 법관의 판결이 지닌 정치성 시비 역시 촛불혁명의 결과라 말할 수 있다. 만일 촛불혁명이 없었다면, 사법부는 여전히 '정의를 수호'하는 '고매한 법관'들의 모임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혁명은 우리의 감수성이 바뀌는 것"이라는 어느 역사학자(후지이 다케시)의 말처럼, 작금의 사법부를 둘러싼 사태는 촛불혁명이 우리의 감수성을 바꾸어놓은 결과로-사법부와 법관 역시 결코 절대화될 수 없는 대상이라는-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 사법부가 촛불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혁명적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지난 1월 9일 사법부를 취재하는 <한겨레> 강희철 기자는 자신의 기사(<느닷없는 우병우 석방, '법원발 역습'의 서막?>)에서 어느 검찰 출신 변호사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작년 하반기쯤, (법원) 부장급 이상이 모인 자리였는데, 자괴감을 많이 토로하더라. 자기들이 집단적으로 시장 좌판에 횟감으로 던져졌다는 분위기? 전엔 존경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대접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아니냐. 평소 보수 성향의 판사들일수록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발 강도가 셌지만, 진보적 입장의 판사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사를 받는 상황이라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판사들 자존심을 살려주는 방안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진보-보수의 성향을 떠나 현재 법관사회의 분위기가 이렇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의 공통분모는 다름 아닌 '엘리트 의식' 또는 '선민(選民)의식'인 것으로 보인다. "전엔 존경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대접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 아니냐"는 언급에서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불행하게도 그들 나름의 엘리트 의식이 새 시대의 진운(進運)에 맞는 적응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즉,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법관을 역임하고 있다면, 어릴 때부터 학교 공부를 잘해 주위로부터 줄곧 '수재'라는 칭송을 듣거나 '오냐, 오냐'의 분위기 속에 자랐을 것이다. 당장 가정에서 뿐만이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도 성적 우열에 따른 차별은 엄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고등학교에는 우등생만을 따로 모아 운영하는 심화반이니, SKY반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뒤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면, 그때부터는 그 자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사회에선 이미 이른바 SKY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의 되지 않는가? 그런 뒤 이들은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통과해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법관이 되었다. 이런 그들이 평범한 일상인들을 내리 깔보며 선민의식을 지니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이제 이를 한 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우선, 한국처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과중한 학습 노동 강도를 자랑하는 사회에서 학교 공부를 잘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 그 정도로 기성의 사회 위계 질서에 대단히 순응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간성을 지녔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신의 출세와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너끈히 견뎌낼 수 있다는 도저한 의지 없이 한국식 교육의 학습 강도를 견뎌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다. 한국의 평가방식은 기본적으로 4지 선다 내지 5지 선다에서 답을 잘 고르는 방식이다. 사법고시 역시 법조문을 있는 그대로 외우는 방식이다. 과연 이러한 방식의 '학습'만으로-공부가 아닌!- 인간과 사회, 일상과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균형감각을 제대로 체득할 수 있기나 할까?

여전히 촛불혁명의 긴 도정을 지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제 법관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바꿀 때가 되었다. 법관을 엘리트로 여기며 선망하거나 절대화해왔던 우리의 의식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적폐청산을 비롯한 혁명과업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법관 역시 세상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장에 소속된 직장인이자 직업인일 따름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독립된 존재라 생각하고 판사의 독립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겠지만 그들 역시 법원이라는 직장에 소속된 존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사법농단이 조직범죄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와 관련해 음미해 볼 주장이다.

아울러 지금 진행 중인 법관과 사법부에 대한 감각의 변화가 촛불혁명의 결과임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은 단순히 박근혜 한 사람을 탄핵한 사태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절대화되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진 '민주주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사태는 그러한 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필연적 사태일 뿐이다. 또 지금의 우리 역시, 촛불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종전까지의 감수성과 감각을 버리고 떨쳐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사법부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과 시선이 바뀐다면, 현재의 사법체제에 대한 대안 역시 거기서부터 자라날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