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년 전 선조의 인연으로 앞서간 앞서 간 사람을 만나다.

휠체어에서 마라톤 까지? 14대 조(祖)에서 이어진 인연으로 내가 이룰 기적을 보다

검토 완료

서치식(ssnoeha)등록 2018.12.22 15:49
 임승팔(84, 청양군 화성면)씨는 지나 봄 필자의 14대조(祖)인 만죽공 서익의 시제(오마이뉴스 기사 : 450여년 만에 잇는 젯메쌀 우정 참조)에서 처음 만났다. 100년이 넘는 고택에서 거동을 못하는 아내를 5년째 돌보고 있는 게 화제가 되어 '인간극장(4327회- 삶이 끝날때까지)에 출연했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지난달 11일로 서익 시제를 찾은 평택 임씨에 대한 답례로 송파 임식의 시제를 찾았던 자리에서였다.     

송파 임식의 시제에 참여한 임승팔씨 20여년 종중회장을 하며 재실을 문화재로 등록해 항구적인 보전방안을 마련했고 매각하는 농협창고를 사들여 정기적인 임대수입원을 만들어 종중의 재정을 안정시킨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는 임승팔씨가 송파 임식의 시제에 참여한 모습 ⓒ 서치식

        그 자리에서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역사이듯 우리 후손들에게 곧 역사가 될 선생님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제안해 이 취재가 이루어진 것이다.
  

동네 입구에 선 큰 상수리나무 수 백년 되었다는 상수리나무를 끼고 돌아서면 충청남도민속문화재 24호, 25호인 임찬주가옥과 임석주가옥이 새색시처럼 얼굴을 내민다 ⓒ 서치식

   

충청남도민속문화재24호 임찬주가옥 임승팔씨의 할아버지 4형제 중 삼형제의 가옥이 충청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사진의 임찬주가옥(24호)과 나란히 있는 임석주가옥(25호)에 임승팔씨가 살고있다. ⓒ 서치식

   

정갈한 고택 마루에서 필자와 함께한 임승팔씨 정갈한 사찰 같은 임승팔씨가 사는 임석주가옥엔 유난히 고양이 강아지같은 동물들이 많았다. ⓒ 서치식

 
다음은 11월 17일, 12월 15일 이틀에 걸쳐 '환자인 아내를 피해 그의 집인 임석주가옥(충청남도 민속문화재 25호) 마루와 주방에서 나눈 대화이다. 그의 할아버지 4형제 중 두 분의 집 역시 충청남도민속문화재 24, 31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경복고 중앙대를 졸업하고 예산에서 직장생활을 하셨고 직장을 그만두고는 야학 활동과 종친회장을 하시며 고향을 지키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젊은 시절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가지셨던 부모님 덕에 서울대에 다니던 사촌형님과 함께 일찍부터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했지요. 고등학교까지는 그런대로 따라갔는데 실력이 모자라 서울대에 떨어지고 중앙대학을 다녔습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많던 경복고인지라 33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 세브란스 병원장을 지낸 이경식박사가 제 동기입니다.
정치인 친구 덕은 본적이 없지만 의료체계가 미비하던 시절, 동네사람, 친척 등의 문제로 제가 의사친구를 많이 괴롭혔지요.
난방으로 연탄을 사용하던 때 예산 농조(農組) 출장소장으로 근무 하던 중에 숙소에서 일산화탄소중독 사고를 당했습니다. 일산화탄소중독은 고압산소치료가 생사를 좌우하는데 지역에는 이를 갖춘 병원이 없어 택시로 서울대병원에 가 고압산소 치료를 받아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극심한 기억상실증과 말초성 신경병증의 후유증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외출했다가 집을 찾지 못할 정도의 기억상실증과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후유증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직장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전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집을 못 찾아 낯선 곳을 하염없이 헤메곤 하던 저를 아내는 무작정 찾으러 다녀야 했고 그렇게 가까스로 찾으면 대 소변조차 분별 못하던 제 행색은 또 어땠을런지요? 그 상황에서도 아내는 제가 모멸감을 느낄까봐 얼굴 한번 찌푸린 적이 없었습니다.     
요양병원에 보내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5년째 아내를 돌보는 제게 주변에서 "대단하다"라고 하는 분이 간혹 있습니다. 극심한 기억 상실증과 대, 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남편을 세심하게 돌보아준 아내의 헌신에 비하면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나날이 무너져 내리는 나의 반쪽 아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객지에 직장을 구할 수가 없어 가까운 예산에서 직장생활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취업난이 극심한 요즘의 젊은이들은 이해를 못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대 독자였던 저는 부모님의 지극한 기대와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또 교육열이 남달랐던 아버님 덕에 어려서부터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어린 제게 든든한 울타리셨던 아버님이 사실은 천형(天刑)이라던 뇌전증(간질)을 앓으셨습니다. 어린 저에게 발작을 일으키신 아버님의 모습은 큰 충격이어서 제가 아버님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유달리 강했던 것이지요. 교통・통신이 발달하고 의료체계가 잘 갖춰진 지금 하고는 전혀 다른 시절이어서 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구요.
멀쩡하시던 아버님이 발작을 일으키면 팔다리가 뒤틀리며 입에 거품을 무는 등의 상태가 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어 백방으로 수소문해 신경외과의 개척자로 초대 서울대학병원장을 지낸 일성( 一醒)명주완 박사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니 과연 발작증세가 없어져 아버님이 활기찬 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은 발작을 아주 없애는 치료제가 아니고 단지 억제만 하는 약이어서 계속 약을 복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간혹 그 약의 수입이 금지 되곤 했습니다. 발작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약이 수입금지가 되니 제 아버님은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그런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해 밀수를 해서 약을 댄 적도 있습니다. 명주완박사님과 인연은 대학병원 은퇴 후 개업한 개인병원을 거쳐 그 아드님이신 명호진 박사에게까지 계속돼 아버님이 86세로 작고하시기까지 간질 발작 없이 생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에게 제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식도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협심증으로 심장수술을 받은 뒤 등산을 시작해 지역의 오서산 최다등반을
 
했고 2회 연속'칠갑산 전국산악마라톤 대회'의 최고령 완주 기록 보유자로 지역에선 유명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뇌전증을 앓으시는 아버님을 위해 밀수까지도 마다않으신 일부터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수술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익장을 과시하신 선생님의 모습이 13년째 재활중인 제게는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전국의 재활환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욕창 방지를 위해 하루에 5~10번 규칙적으로 2.30분씩 앉게 돌보는 임승팔씨 아내가 5개월 남짓 병원치료에 3번의 욕창이 와 큰 고생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앉게[하는 임승팔씨의 세심한 돌봄으로 5년간 단 한번도 욕창을만큼 아내를 세심하게 돌보는 모습 ⓒ 서치식

 
앞에서 말씀드린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극심한 기억상실과 대, 소변을 분별 못하는 말초성 신경병증은 병원에서도 치료법이 없다고 해 전 부모님의 권유로 민간요법인 개소주를 먹게 됩니다. 저를 위한 어머니와 아내의 지극정성에 처음에는 그저 마지못해 먹었지요. 그런데 먹는 횟수가 늘면서 집을 잊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을 알겠더군요. 처음에는 그 차이가 미미해 잘 모르겠다가 1년이 지나며 그 차이를 느끼기 시작해 3년째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전 우리 몸의 회복력이 대단하다는 것과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민간요법이 병원치료로 불가능하다던 일산화탄소 중독 후유증을 말끔히 치유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함석헌(사학자, 1901~1989)선생님의 사진을 고이 간직한 임승팔씨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함석헌선생님을 추종했다는 임승팔씨는 지금도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 서치식

   

야학활동을 하던 시절 시대의 큰 어른인 함석헌, 유달영선생님과 자문을 받았던 서신신 시대의 큰 어른이셨던 함석헌, 유달영선생님께 자문을 구하느라 오간 서신을 역시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 서치식

 
그렇게 건강을 회복해 야학 등 지역에서 활동을 하던 저는 2002년 협심증으로 심장수술을 받고 숨이 차 100미터도 채 걷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체의 신비한 회복력을 이미 경험한 저는 집에서 약 4킬로 떨어진 오서산을 목표로 매일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100미터를 시작으로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기 시작해 오서산 등산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등산은 2015년까지 620회를 오르게 되고 "칠갑산 전국산악마라톤대회"에서 7·8회 연속으로 최고령 완주자로 이름을 올렸었지요.
2대 독자인 제가 병약해 부모님께 늘 걱정만 끼쳐드리다가 어머니가 96세 되셔서야 칠갑산 전국 산악 마라톤대회 완주 메달로 어머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뇌병변2급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13년간 가열 찬 재활을 하며 하프마라톤 완주를 준비하신다는 기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용기와 노력에 큰 찬사를 보냅니다.
인체의 신비한 회복력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뇌병변 2급 장애를 가진 기자님의 하프 마라톤 완주는 얼마든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숨이 차 100미터도 걷기 힘들던 때의 제겐 794.4M의 오서산 등산이나 칠갑산 산악 마라톤 완주는 막연한 희망 일뿐이었습니다. 그 막연한 희망을 향해 한발 한발 걷다보니 호흡이 안정되고 근육에 힘이 붙으며 산악마라톤까지 가능해진 것이지요. 그런 경험을 했기에 "기적은 노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라는 기자님의 말씀에 전 100% 공감합니다.
 
전 재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운동이 치료다"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실제 저는 숨이 차 100미터도 걷지 못하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못한다니 한없이 두려웠습니다. 의학적인 해결 방안이 없어 제 힘으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방법인 운동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전 제 몸으로 운동이 곧 치료임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장애인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재활운동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가 한켠에 지금도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는 함석헌선생님의 책을 자아스레 보여주는 임승팔씨 옛 사랑방을 서재로 사용하고 계셨는데 농촌에 사는 지식인의 고뇌가 묻어났다. ⓒ 서치식

     

붓글씨를 연습한 한지를 정리해둔 모습 별채인 사랑방을 서재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오래된 서적부터 수준급의 서예 작품, 붓글씨를 연습하던 한지까지 일일이 색인표를 달아 정갈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의 서재에서는 옛 선비의 정취가 묻어났다. ⓒ 서치식

   

앞서간 사람!
3회(11월 11일, 17일, 12월 16일)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에게 든 생각이다.
임승팔씨는 분명 내 앞에 발자국을 남긴 선배였다. 완전한 재활을 목표로 스스로를 엄하게 몰아가며 이른바 자가재활을 하며 내가 겪어야 했던 지독한 외로움이 생각났다. 3년의 병원치료 후에 '평지에서 50M를 걸을수 없는' 뇌병변 2급 장애 판정을 받은 몸으로 21.0975Km를 세 시간에 주파해야 하는 하프 마라톤 완주를 내 재활의 목표로 세우고 자가 재활에 들어가던 때 내게는 앞서간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앞서간 사람을 450년 전 조상의 인연으로 내 재활의 끝머리에서 숙명처럼 만난 것이다. 450년의 세월을 넘어 이루어진 앞서간 자 임승팔씨와의 만남처럼 뇌병변 2급 장애자인 나의 하프마라톤 완주도 이루어질 거라는 다짐을 하며 취재를 마쳤다.
 
 
 
덧붙이는 글 더 이상 병원에서 도움 받을것이 없는 처지에서 건강하게 살려는 의지 하나만으로 치열하게 노력한 사람. 14대조 할아버지의 절친 이었던 송파 임식의 13대손인 임승팔씨가 재활 초년병 시절 내가 그토록 찾고자 원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앞서간 사람 임승팔씨의 뒤를 곧 내가 이을 것이고 뒤 따를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기록을 남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