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이쾌대 <이여성>, 우 이쾌대 <자화상>.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 <거장 이쾌대-해방의 대서사시> 도록에서 재촬영.
유족 소장
서촌에서 살며 뜻을 펼치던 이들 중에서 이여성과 이쾌대(李快大, 1913∼? )는 친형제이다. 두 사람은 경북 칠곡 출신이나 일찍 경성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형 이여성이 먼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동생 이쾌대는 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닌다. 학생 시절 두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 중학동이었는데, 이들이 다닌 학교와 가까운 곳이었다.
공교롭게 두 학교는 계동과 원서동에 이웃해 있었는데, 모두 미술에 선구적인 모습을 보이던 학교였다. 중앙고보에는 고희동, 이종우가 교사로 있었고, 휘문고보에는 고희동, 장발 등 유명한 화가들이 교사로 있었다. 중앙고보에서는 이여성과 김용준이 나와 화명을 날렸고, 휘문고보에서는 이승만, 윤희순, 이쾌대, 전형필 등 미술계 인사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이여성과 이쾌대는 1930년대 후반 중학동에서 서촌으로 이주하여 자리 잡는다. 이여성의 집은 옥인동 56번지였는데, 이상범의 집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이쾌대의 집은 궁정동 16-3 번지였는데, 지금의 청와대 왼쪽 바로 앞이다. 두 사람의 집은 거부인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다.
일찍 결혼한 이쾌대가 곧 유학에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거처를 준비한 것이다. 아버지 이경옥은 이쾌대가 돌아오기 전 해인 1938년, 옥인동에 2층 목조로 큰 집을 지어 장남인 이여성에게 살게 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막내 이쾌대에게는 1939년 아담한 한옥 집 한 채를 사주어 살도록 한다.
형 이여성은 다방면에 많은 재능을 가진 이였다.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화가이자, 학자요, 평론가이기도 하였다. 호는 청정(靑汀),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이다. 사실 '여성(如星)'이란 이름자도 본래 친구 고모부가 '별처럼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호였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평생 이름처럼 사용한다.
그는 고보 졸업 후 일본 도쿄의 입교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새로운 사조였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신여성이었던 성악가 박경희(朴慶姬)와 결혼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활동과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4년에는 여운형을 따라 건국동맹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초 근로인민당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월북하고 만다.
동생 이쾌대는 휘문고보를 다니던 중 담임교사였던 서양화가 장발의 영향을 받아 미술을 하게 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한편으론 도쿄에 먼저 유학한 형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여 1938년에 졸업한다.
돌아와 궁정동에 3, 4년 살다 보문동으로 이사가 '성북미술연구소'를 차려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 의용군으로 참전한다. 곧 포로가 되어 거제 수용소에서 갇혀 휴전을 맞이하나, 남북 포로 교환 때 자의로 북한을 택하여 넘어간다.
이여성의 '청정'이란 호에 얽힌 우스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