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사 동상부산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다.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박재혁 의사의 의거는 몇 가지 점에서 재조명되고 박 의사의 투쟁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첫째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3ㆍ1혁명이 좌절 또는 침체기에 빠졌을 때 박 의사의 의거는 독립운동 진영에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러주고 국내외에서 무장투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의거 직후인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21년 2월 16일 양근환 의사가 도쿄에서 친일파 민원식을 사살한 사건, 7월 25일 안용도 의사가 지휘하는 의용대가 흥원군청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교전 끝에 일경 2명 사살, 9월 26일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단행 등이 이루어졌다.
이 해 한 해 동안 국내에서만 일본경찰서 습격사건이 91건이 발생할 만큼 박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사건은 항일투쟁의 새로운 불꽃이 되었다.
둘째는 의열단에 새로운 투지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의열단은 첫 거사가 좌절된 이후 침체상태이다가 박 의사의 거사 성공으로 용기충천하여 폭렬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의열단은 1920년 12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1921년 9월 김익상 등의 조선총독부 투탄, 1922년 3월 김익상ㆍ이종암 등이 상하이 황포탄에서 다나까 일본육군대장 저격,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습격과 일경과 총격전, 1923년 3월 김시현 등의 두번째 총독부 폭파준비, 1924년 1월 김지섭의 일왕궁 2중교 투탄,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일본밀정 김달하 처단 등 크고 작은 혹은 성공하고 실패한 의열투쟁이 계속되었다.
세째는 일제에게 조선통치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고, 조선인의 자주독립 정신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저항정신ㆍ의열투쟁의 맥락을 민족사에 남겼다. 멀리는 안중근 의거로부터 박재혁 의거로 이어지는 항일투쟁의 국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