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봉황문의 남문' 1923년
황정수
또한 2회 전람회에서는 <봉황성(鳳凰城)의 남문(南門)>이라는 작품으로 4등상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 또한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혜석의 미술계 발걸음 하나하나는 모두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일이 되었다.
이후에도 1926년에는 <천후궁(天后宮)>으로 특선을 하고, 1931년 10회에서는 출품작 두 점이 모두 입선되는 등 1933년까지 꾸준히 출품하였다. 이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출품이 사라지자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나혜석은 1933년 '여자미술학사'라는 미술학원을 차려 후진을 양성하고자 한다. 이미 1922년 만주 안동에서 '여자야학'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경성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화숙을 경영하고자 한 것이다.
'여자미술학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도쿄에서 유학한 모교 '여자미술전문학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 화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불륜과 이혼 등 사회적 문제에 얽혀 삶이 흐트러지자 곧 문을 닫고 만다.
김우영과의 이혼 후 나혜석의 삶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화가로서의 활동도 위축된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빠의 경제적 지원도 끊긴다. 계속 이어지는 급진적인 사상의 글과 개인사적 소송 등이 이어지며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듣고, 아이들까지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나혜석의 심신은 병들어갔다.
1935년에는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치기도 하나 정상적인 화가로서의 삶은 아니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게 되어 방랑생활을 한다. 점차 몸은 피폐해지고 1944년에는 인왕산 자락 모교 근처에 있는 청운양로원에 들어가는 등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이후에도 여러 곳을 떠돌던 나혜석은 1948년 12월 원효로에 있는 시립 자제원(慈濟院) 병동에서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맞이한 4개월 후인 1949년 3월 14일이 되서야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나며 신원이 밝혀져 죽음이 알려지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화가의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
문화사에서 보통 '최초'라는 불리는 것들은 대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때론 위대하다고 불린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까지 늘 훌륭한 것은 아니다. 한국 근대 서양화단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져 초기의 화가들에 대한 평가도 이와 유사하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1909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로 유학하여 유화를 공부한다. 이어 동우(東愚)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1911년, 유방(維邦) 김찬영(金瓚永, 1889-1960)이 1912년에 계속해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
이들 세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 한국의 미래 서양화단을 짊어질 것이라 기대하던 재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하여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서양화단을 떠나고 만다.
고희동은 처음에 시작했던 동양화로 회귀하고, 김관호는 서예에 전념을 하였으며, 김찬영은 문학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끝내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이들은 서양화를 한국에 유입한 초기의 공적은 크나 평생 서양화가로서 살지 못한 결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과 비교할 때 나혜석의 삶은 독보적이다.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후 한 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산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구미를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버리고 산 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천생 화가였다.
당시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나혜석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격이 더욱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는 여러 역경이 있을 때에도 항상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나혜석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어떤 남성들보다 더 그림을 사랑하고 한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러한 까닭에 필자는 나혜석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