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약산 김원봉(1898~1958). 그는 일찍이 의열단을 조직하여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을 전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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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의 활동은 더욱 바빠지고 활동영역도 훨씬 넓어졌다. 지린에 임시 본부를 두고, 베이징 · 텐진 · 난징 · 홍콩을 왕래하면서 단원 모집과 폭탄 입수에 주력하였다. 뜨거운 정열의 소유자인 김원봉은 젊은이들을 감화시키는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와 한번 만나 대화를 나누면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지는 의열단원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원봉은 만나는 조선청년들에게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럼으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고 설득하였다. 그의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충정에 청년들은 감화하여 단원이 되고 죽음도 마다 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김원봉의 말(시국담)에 감복되어 의열투쟁을 벌이게 된 김익상 (金益相) 의사 관련의 자료가 있다.
"오랫동안 초조히 불안한 중에 내탐(內探) 하고 있던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이 곧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경성부근 공덕리 소생으로 어려서 삼호보성학교에 다니다가 빈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북동 송광순 씨의 경영인 연초회사 광성상회의 고용으로 들어가 봉천지점 기관수로 간 것이 해외 웅비의 제1보였다 한다. 비행학교를 목적하고 광동으로 달려갔으나 남북전쟁으로 비행학교가 폐쇄되어 상해를 거쳐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의 시국담을 듣고 그 부하가 되어 조선 ○○운동에 전력할 뜻을 품고 폭탄 2개를 몸에 가지고 일본 목수의 행색으로 국경을 넘어 경성에 들어와서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