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부왕사지의 안온한 풍광은 등산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2m가 넘는 석축들 16개가 우람하게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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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철(kkc0828)등록 2018.11.01 18:04
 

부왕사지의 만세루가 서 있던 자리의 누대들 2m가 넘는 높이의 누대들이 남아 있는 모습으로 보아 부왕사의 규모를 실감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 김광철

 
10월 20일, 생태환경교육운동단체인 초록교육연대 회원인 나는 초록교육연대에서 시행하는 북한산 등산길에 나섰다. 
아침에 서울의 전철 3호선을 타고 연신내역이나 구파발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서 하나고등학교 앞으로 모이라고 했는데, 버스를 잘못 타서 좀 헤매면서 일행들보다 늦어서 "나를 기다리지 말고 먼고 가고 있으면 쫓아가겠다."하여 택시를 타고 삼천사를 향해서 한참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서야 일행들을만날 수 있었다.  

회원들 10여 명이 북한산의 삼천사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특별히 이번 북한산행에는 구파발의 은평뉴타운에 살고 있으면서 그 누구못지 않게 북한산을 많이 올랐던 조창원 선생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삼천사 입구에 있는 거북이 상 작은 연못에는 자연석의 모습을 거의 다듬지 않고 만들어지 거북이 상이 우리 눈길을 끌었다. ⓒ 김광철

   

삽천사의 마애불 삼천사 계곡의 마애불이 계곡을 복개하여 만든 참배터 때문에 원래의 아름다움을 많이 손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 김광철

 

삼천사는 내가 그 전부터 많이 오르던 사찰이라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삼천사 앞에는 그 전에 없던 9층석탑이 세로 조성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히 삼천사 입구의 작은 연못에 자연석을 약간 조각하여 만들어 세운 돌거북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옛날의 삼천사는 현재의 삼천사보다 훨씬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삼천사 바로 뒤의 계곡 암벽에 고려 때 새겨져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은 원래 게곡에서 바라보면 사람 키의 2~3배 높은 암벽 위에 새겨져 있어서 올려다보는 멋이 일품이다. 지금은 마애불 바로 밑에까지 계곡 위를 시멘트로 덮은 참배장이 들어서서 본래 올려다 보던 마애불의 위용은 크게 쇄락해 버린 것이다.

우리 일행은 삼천사 마애불을 뒤로 하고 북한산성의 동암문 쪽을 향해 올랐다. 산세가 가파랐다. 60세 전후의 회원들은 비지땀을 흘리면서 30~40분 올랐더니 드디어 북한산성 동암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암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비밀통로인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성 밑에 작은 통로인데, 이곳 동암문은 홍에문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조선생은 설명을 이었다. 원래는 낮고 작은 문이었는데, 일제 때 성을 수리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고쳐버려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동암문 근처에서 싸고 간 김밥 등 도시락 점심을 먹고 대서문이 있는 북한산성 계곡 쪽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동암문 주변 계곡은 단풍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북한산의 그 어떤 곳보다도 단풍나무들이 많은 계곡이었다. 아직 단풍이 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닷새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단풍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동암문에서 한 300m 쯤 내려오는데, 조선생이 "부왕사지를 둘러봅시다."고 하면서 계곡 옆 등산로에서 오른쪽으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들어갔다. 작은 둔덕 앞에 이르러서는 "지난 봄에 왔을 때는 이곳에 노루귀 여러 그루가 한창 피어있어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밟고 지나다니고 있어서 돌무더기를 쌓아서 주변을 가려주었다."하면서 그 흔적들을 가르쳐 주었다.

 

단풍이 곱개 물들어 있는 부왕사 계곡 10월 19일, 최고 절정을 맞기에는 한 5일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 김광철

 

부왕사지를 올려다 볼 수 있는 둔덕 위에 섰더니, 2m 정도의 화강석 누대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16기가 우뚝우뚝 서 있었다. 부왕사 사찰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자리잡았던 만세루가 세워져 있던 곳이다.  우리 일행은 이 누대에 기대어 기념 사진을 찍은 다음 누대 뒤에 있는 돌계단을 위로 올라갔다. '부황사'라고 한자로 쓰여 있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조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일제 때 '부왕사'를 '부황사'라 고쳐 세워놓았다고 한다. 일본 신사 참배를 연상하게 하는 절 이름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 옆에는 높이 1m 정도의 부도탑 한 기가 외롭게 서 있었다. 부왕사지의 중심에 극락전이 있었다는 건물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뒤의 산 비탈에는 가건물로 요사채가 세워져 있고, 절터의 한 켠에는 천막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 사지를 정비, 관리하기 위하여 스님이 묶고 있다고 한다. 

 

'부황사'라고 쓰여 있는 표석 사찰의 건물들은 간데 없고, 표석만 남아서 나그네를 반기고 있었다. ⓒ 김광철

 

이런 풍광들을 보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더니 북한산의 유명한 바위들인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 등이 단풍이 곱게 물들어있는 나무 숲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손짓이라도 하듯 한눈에 들어왔다. 북한산의 능선들과 여러 봉우리들이 이 절터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었다. 참 편안하고 좋은 곳이다. 봄에 진달래가 필 때 찾아도 참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터의 뒤쪽 위에는 행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 전에 북한산행을 할 때 거쳐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왕사는 그 행궁을 지키기 위하여 승려들이 주둔하는 절이었던 것이다.

북한산성은 백제 때부터 세워져 이미 있던 산성이다. 그후 고구려와 고려 등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개축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산성을  누구보다 중요시 했던  숙종이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711년에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을 한 것이다. 전국의 많은 승려들과 병사들 장정들을 동원하여 1년도 안 되는 공사 기간 동안에 쌓았던 것이다. 더구나 숙종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강화성이나 남한산성 등으로 피난할 것이 아니라 도성과 북한산성을 바로 연결시켜 피난할 수 있도록 탕춘대성도 쌓았다.  

북한산성 안에는 산성을 지키는 13개의 승영이 있었는데, 그 중심이 중흥사이다. 행궁의 규모가 130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부왕사는 111칸의 규모라고 하니 절의 규모도 중흥사에 이어 상당한 규모였다.

부왕사는 만세루지의 장초석과 극락전지 등 주요 흔적들이 노출되어 있음에도 전혀 정비되지 못하고 있었다. 근래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법당(극락전지)과 만세루지 및 고래시설이 있는 승방, 부속전각 등과 함께 승영사찰로서 창고건물지 등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조선생은 우리 일행을 향해서 누대들이 세워져 있는 앞을 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물었다. "지형이 어떻게 생긴 것 같으냐?" 내가 '거북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곳 부왕사지는 그 규모며, 남아있는 누대, 주변 경관, 지형 등 여러가지 면에서 탐방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회가 되어 북한산성을 찾는다면 꼭 한 번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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