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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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대한광복회는 1916년부터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여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부로 하고, 영주ㆍ안동ㆍ영천ㆍ삼척ㆍ예산ㆍ연기ㆍ인천ㆍ광주ㆍ용천에 곡물상을 설치하고 연락처로 삼았으며, 서울과 황해도 해주와 만주 안동 (지금의 단둥 丹東)에는 여관을, 그밖에도 만주 창춘(長春)에 이관구가 설치한 삼달양행과 상원양행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리고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 연락처를 개척하고 있었다.
[강령] 대한광복회의 강령을 통해 조직의 목적과 활동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부호의 의연(義捐) 및 총독부가 불법 장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이로써 무장을 준비한다(무장준비).
②남북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사관학교 설치).
③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독립군 양성).
④중아제국(中俄諸國)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무기구입),
⑤본회의 군사행동ㆍ집회ㆍ왕래 등 일체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요지와 베이징ㆍ상하이 등에 지점 또는 여관ㆍ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일본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일인과 반역자 처단),
⑦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독립전쟁),
강령을 정리하면, 첫째 군자금 수합, 둘째 독립군의 양성, 셋째 국내에 100개소에 각기 1만 원의 기금으로 잡화상을 설치하여 연락기관으로 운영, 넷째 무기의 비축, 다섯째 이와 같은 준비를 통해 혁명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중국에서 군관교육을 받았고 혁명대열에도 참가한 경험이 있는 이관구가 1916년에 가입함으로써 더욱 계획이 체계화되었다.
대한광복회는 대구에서 1915년 7월 결성된 이후, 그 해 12월 만주 지린(吉林)에서도 우재룡ㆍ손일민ㆍ주진수ㆍ이홍 등에 의하여 광복회지부가 조직되었다. 또한 1916년 서울을 중심으로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때 노백린ㆍ김좌진ㆍ신현대ㆍ윤홍중ㆍ신현두ㆍ김정호ㆍ권태진ㆍ임병한ㆍ윤형중ㆍ김홍두ㆍ윤치성ㆍ이현ㆍ박성태ㆍ명기섭 등이 가입하였다.
그 후 경북 칠곡부호 장승원과 대구부호 서우순의 처단에 실패하고, 총사령 박상진이 그 여파로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총포화약류단속령' 위반으로 피체됨에 따라 광복회가 크게 타격을 받게 되어 노백린은 미주로,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는 등 많은 인사가 국외로 탈출하였다.
[주요활동] 대한광복회의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무력 준비를 목적으로 일반 부호의 의연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군자금 모집은 부호들의 재산을 조사해 먼저 그들에게 배당금 통고문을 보내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찾아가 의연금을 받아오는 형식으로 집행되었다. 중국에서 통고문을 발송하는 것은 대부호로 국한하고, 소자산가들에게는 국내에서 각 지부별로 고시문이나 경고문을 제작하여 발송하였다. 또한 배당금도 대부호들은 1만원에서 100만원 사이의 금액을 지정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대한광복회는 통고문의 효력을 높이고 군자금의 모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친일부호들을 처단하기로 작정하였다. 당시에는 고지서를 받고 모금에 호응한 사람도 있었지만, 일경에 고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친일성이 강한 대표적 부호를 처단하기로 하고, 1917년 말과 1918년 초에 걸쳐 경북 칠곡군 부호 장승원,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 전남 보성군의 양재학과 낙안군의 서도현을 처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장두환이 피체되고 광복회 회원들이 피체되어 조직이 해체되기에 이르렀고, 김한종ㆍ김경태ㆍ유창순ㆍ장두환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같이 처음에 혁명단체로 출발한 대한광복회는 1917년 말부터는 의열투쟁단체로 전환해갔다.
그러다가 1918년 초에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ㆍ채기중ㆍ김한종 등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으며, 그 밖에 수많은 인사가 옥고를 겪어야 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활약하다가 발각되지 않은 우재룡을 비롯하여 권영만ㆍ한훈 등은 그 뒤에 암살단이나 주비단을 결성하여 활약하였고, 황상규ㆍ김상옥은 암살단을 거쳐 의열단에서 활약하다가 모두 장기간의 옥고를 치르거나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