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상회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독립기념관
이들은 상업조직을 광범하게 활용하였다.
대표적인 상업조직은 박상진의 상덕태상회, 서상일의 태궁상회, 윤상태의 칠곡군 왜관 향산상회, 안희제의 부산 백산상회, 통영의 곡물상 서상호, 마산 이형제의 원동상회와 김기성의 환오상회 등이었다.
상업조직은 일제의 무력적 탄압이라는 악조건 하에서 비밀지하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정보연락과 재정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고 부호들에게 쉽게 접근하여 활동하는 데는 상업조직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업조직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이나 만주 독립운동단체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과 상호 연결되어,국내ㆍ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서상일의 태궁상회와 윤상태의 향산상회가 국권회복단의 거점이라면, 박상진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의 거점이었고, 부산의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 단둥(安東) 이관구의 삼달양행, 서세충의 성신태상회, 신백우의 성덕태상회, 창춘(長春)의 상원양행, 핑티엔(奉天) 이해천의 해천상회 등의 곡물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단원 박상진ㆍ정운일 등이 풍기의 광복단과 연계하여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면서 조직의 활동영역이 더욱 넓어졌다.
뿐만 아니라 경남 일원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과도 제휴하였다. 단원으로서 대한광복회에 참여한 인사는 박상진ㆍ이시영ㆍ정순영ㆍ홍주일ㆍ정운일ㆍ최준 등이 있으며, 대동청년단에 관련된 인사로는 윤상태ㆍ서상일ㆍ신상태ㆍ남형우ㆍ박영모ㆍ안희제ㆍ박중화 등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결성 이후 1919년 조직의 전모가 일경에 노출될 때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는 바, 최대의 과제는 만주나 노령과 연결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지원이었다.
설립 초기 국권회복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재력을 가졌으므로 자신의 재산을 희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만으로는 군대양성이나 무기구입에 부응할 수 없어, 대구를 비롯한 국내 자산가들로부터 일정액을 갹출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목표하에 정운일ㆍ최병규ㆍ최준명 등은 대구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1차로 1915년 4월경 최준명은 서창규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6월경 최병규ㆍ정운일ㆍ김재열 등은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