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에 인터뷰와 함께 실린 항일의병 사진 (1907년).
의병박물관
박재혁은 국치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소식을 들었다. 정보가 차단되고 국내의 유일한 신문 <매일신보>는 언론의 기능보다 총독부의 홍보선전지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의 민족운동에는 왜곡과 날조를 일삼았고, 총독부 발표문에 의존하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전개된 항일운동은 민족주의 인사들의 비밀채널을 통해 전달되거나 입소문으로 비교적 생생하게 알려졌다.
박재혁은 학창시절 구세단 활동을 했던 관계로 그 인맥을 통해 각지의 항일운동 관련 소식을 듣고 더욱 독립정신을 키웠다. 특히 대구의 박상진이 영주에 세운 곡물상 대동상점과는 은밀한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각종 정보를 듣게 되었다.
국치 이후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항일운동은 1913년 채기중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이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풍기에서 살게된 채기중은 이곳에 모여 사는, 각지에서 온 인물들을 모아 광복단을 조직하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군자금 모집과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은밀히 연계하였다.
풍기지역은 한말의 <정감록>에 나오는 수선지(首善地)로 알려져 8도의 이주민이 모여들었다. 광복단을 결성한 인사들도 이곳 출신이 아니라 팔도에서 모여든 인사들이었다. 풍기지역은 팔도 이주민의 출입이 잦은 곳이기 때문에 의병이나 지사들이 은거하여 활동하기에 좋았다.
광복단의 주요 인사는 채기중(상주)ㆍ유창순(천안)ㆍ유장렬ㆍ한훈(청양)ㆍ강순필(상주 또는 봉화)ㆍ김병렬ㆍ정만교ㆍ김상옥ㆍ정운홍(괴산)ㆍ정진화(예천) 등으로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의 인사들이다.
그 외 일제침략과 더불어 출신지의 생활근거를 잃고 모여든 인사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강순필은 이강년 의진의 의병이었고, 유창순ㆍ한훈도 민종식 의진의 의병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의병적 기질의 인사가 다수 참여하여 결성된 것이다. 풍기광복단의 방략은 독립군의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의 모집에 있었다.
그러므로 채기중은 강병수와 함께 군자금탈취를 계획하여 한때 영월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重石鑛)에 광부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부호가를 대상으로 자금수합의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일 대구의 박상진이 설립한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곡물상)을 이용하여 각처와 연락하였고, 만주의 독립군기지와 연락이 잦은 안동의 이종영 자택을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또한 대동상점과 이종영의 집을 거점으로 재만독립군과 연락하며 일본인 광신이나 부호가를 대상으로 군자금수합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