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민영환의 모습.
중학교 국사 교과서
민영환(1861~1905)은 문과에 급제하여 약관에 병조ㆍ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미국 공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외부ㆍ학부ㆍ탁지부대신을 지내면서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으려고 분투하다가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 자리에서 쫓겨났다.
시종무관장 재임 때 을사늑약 폐기를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조병세(1827~1905)는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증광병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ㆍ대사헌ㆍ공조판서ㆍ이조판서ㆍ우의정ㆍ좌의정 등 요직을 거쳤다. 동학혁명과 일제침략기에 정계를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하여 중추원의장과 임금의 고문인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896년 폐정개혁 19조를 상소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을사5적 처단을 주창한데 이어 이상설 등과 을사늑약의 폐기를 상소했다. 왜경에 연행되어 가평 향리로 추방당하자 1905년 8월 음독자결했다.
박승환(1869~1907)은 구한국군 참령으로 시위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중, 1907년 7월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퇴위당하자 복위운동을 펴기 위해 궁중에 돌입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8월 한국군 해산령이 내리자 이에 불복하여 자결했다. 이를 계기로 다수의 구한국군 출신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준(1859~1907)은 이상설ㆍ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서를 갖고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의 불법ㆍ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일본과 열강의 반대로 무산되자 울분 끝에 순국했다. 함북 북청출신으로 법관양성소에서 공부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조정 대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가 면직되었다.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과 함께 을사5적을 규탄하다가 헤이그특사로 선정되었다. 사후 궐석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홍범식(1871~1910)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전북 태인군수 재임시 의병을 보호하여 일본군의 검거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가 목메어 자결했다. 남긴 유서 5통은 왜경에 압수돼 그 내용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