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화숙 풍경
황정수
이상범 가옥은 말 그대로 그가 생활하던 집이고, 그의 화실 청전화숙은 옆집을 사서 안쪽에서 터서 서로 오갈 수 있게 한 곳이다. 집의 정면에 걸려 있는 당호 '누하동천(樓下洞川)'이란 글씨는 이상범의 글씨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한학자로 유명한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1920-2006)의 글씨이다. 담벼락의 꽃문양 벽돌이 참으로 아름답다. 화실은 아직 그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그대로 둔 상태였다.
생생한 느낌의 초상화가 주인처럼 방을 지키고 있고, 민형식(閔亨植, 1859-?)과 손재형(孫在馨, 1903-1981)에게서 받은 글씨가 걸려 있는 것으로 그의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다. '청전화숙'이라 현판을 쓴 이가 궁금하여 보니, 의외로 유명한 작가가 아닌 운방(芸邦) 유소영(柳小英)이란 이다. 생각해 보니 유명한 서예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의 딸로 홍대 미대를 다닌 이다. 사제 간의 인연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한국 패거리 미술의 원조 청전화숙
한국미술사에서 화가 이상범이 이룬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청전화숙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화숙은 일본식 미술교육 형태로 개인적으로 도제교육을 하는 곳이다. 그는 누하동 자신의 작업실에 청전화숙이란 이름을 걸고 제자들을 모아 그림을 가르친다.
화가가 화숙을 운영하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으나, 그가 조선미전의 심사에 관여하고 있는 권력자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몰려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는 면에서 훗날 한국미술계를 패거리화 하는 원조가 되었다는 비난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실제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세력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참여로 활동한 김은호와 이상범 두 사람이었다. 먼저 화숙을 만든 이는 김은호(金殷鎬, 1892-1979)였다. 김은호는 1929년 자신의 집에 '낙청헌(絡靑軒)'이란 화숙을 설치하여 제자들을 받아들여 조선미전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다.
이어 1933년에 이상범이 '청전화숙'을 설립한다. 다분히 김은호의 낙청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낙청헌은 주로 채색화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화 계열로 활동하였고, 청전화숙은 산수화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 계열로 활동하며 한국미술계를 양분하였다.
이때부터 한국미술계의 계보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조직이 훗날 서울대와 홍익대가 한국미술계를 양분하는 상황의 시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은호의 후예들이 주로 서울대에 자리 잡았고, 이상범의 후예들이 주로 홍익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서울대가 북종화 계열의 감각적인 회화가 강하고, 홍대는 산수화 등 남종화 계열이 강했다. 점차 이런 분위가 퇴색해 갔지만 교풍의 원류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