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다 - 근대와의 조후, 군산

역사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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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래(whatnew)등록 2018.04.09 13:10
시간의 사전적 정의는 시각과 시각사이의 간격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되어있다. 이 용어의 설명에서 시각과 시각을 다시 정의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블랙홀처럼 빨려들 수밖에 없는 이 '정의' 규명 놀음은 자칫 소모적인 사고로 흘러 제 꼬리를 잡으러 뱅글뱅글 도는 고양이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시간을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막막해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다만 흐름으로만 인지 할 수 있는 것, 마치 바람처럼.
군산은 마치 이공일팔(2018)으로 포장된 일구삼공(1930)과자 같은 느낌이었다. 90여 년 전 과거로의 회귀를 위해서는 많은 추억과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내가 살아왔던 7-80년대의 삶과 책이나 영화에서 주워들은 간접적인 경험들이 믹싱 돼 거기에 닿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젊은 세대들 보다 공감의 폭이 훨씬 컸기에 피부로 느끼는 근대적인 시간과의 조우는 꽤 괜찮았다.
한편, 그곳은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근대엔 일제의 침탈로, 현대는 거대 자본의 수탈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한 숨소리 같이 나부끼는 낡은 프랑카드의 구호들로. 역사는 여전히 수레바퀴로 돌고, 돌고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냥 박물관의 관광상품이나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풍경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데.

출발은 토요일 늦은 5시. 과거로 달리는 타임머신의 창에 풍경은 보이지 않고, 시간의 흐름만 인지할 수 있을 뿐, 한지에 먹물이 번지듯 어둠이 깔리는 일그러짐만 있었다. 그렇게 3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인터넷에서 본 그 유명식당 앞엔 흰 종이로 '정기휴일'이라고 적혀있었다. 누가 관광지 유명 식당이 주말에 휴무를 한단 말인가!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전화해 볼 생각이 1도 없었던 안이한 생각이 바로 근대적 사고로 접근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해는 벌써 기울고, 시간이 더 지체되면서 식솔들 밥도 굶길까 맘이 급해져서 플랜B로 움직여야 했다. 이번엔 현대적 사고로 전환해 전화를 먼저 걸었다. 다행이 받기는 했는데 영업시간까지는 30여분 밖에 남지 않았단다. "이 동네는 초저녁 잠이 많은 시골 아부지 같은데."하고 허허롭게 웃었다. 또 타임머신처럼 풍경은 보지 않은 채 낯선 길을 재빨리 달렸다. 어둠이 깊어지는 길의 한 복판에서 길을 찾는 나에게 재깍이며 숫자만 바뀌는 디지털 시간의 존재란 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어 야속했다. 넓게 어둠이 펼쳐진 새만금을 지나 다시 되돌아 호텔 근처 식당에서 간신히 밥을 먹었다. 바닷가에서 꼭 회를 먹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내륙에 사는 사람이 오랜만에 바닷가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도 이상하잖아. 우리는 이상하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회를 먹었다. 군산의 시간보다 회는 훨씬 신선했다.
호텔은 깔끔했지만 한 밤 중에 수레바퀴 덜컹거리는 듯한 기계음에 잠을 깼고, 침대에 익숙해져버린 허리는 얇은 이불의 온돌에 견디지 못했다. 잠은 낯설음과 겹쳐 들짐승처럼 사납게 날뛰어 설쳤다. 되돌아보면 이곳으로의 여행에서 생긴 모든 에피소드가 마치 근대적인 설정에 맞춰서 내게 다가온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묵직한 머리에 개운하지 않은 몸을 일으켜 햇살이 튕겨 들어오는 호텔 커튼을 열었더니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고 큰 공장 지붕들이었다. 창 가득 담겨온 풍경이 호텔답지도, 여행지답지도 않았다.
근대역사 박물관으로 향하는 공장지대 풍경도 낡아서 마치 미래소년 코난이 살아가는 도시처럼 삭막했다. 곳곳엔 GM자동차 노동자들의 외침이 바람에 낡아서 메아리도 없이 쓸쓸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항구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뻘 위에 올라앉은 배들은 붉은 치마를 두른 듯 녹이 슬어있었고,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 하얗게 부서지며 산화하고 있는 밧줄은 노인의 지팡이 잡은 손처럼 간신히 삶을 붙들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눈에 들어온 풍경은 이국적이었다. 선입견이 더해져 마치 가보지도 못한 일본의 어느 시골 관광지가 이렇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커피숍이나 농특산물홍보센터 건물마저도 나팔바지 입던 고릿적 패션의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근대거리에서 만난 잡화점이나 형제고무신방(房)은 바로 아버지 세대에서 나에게로 이어진 시간의 축을 잡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검정고무신을 신었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천으로 된 운동화로 바뀌었지만 가정형편이 나아져서 그런 건 아니고 규정이 검정 교복에 그것을 신어야했기 때문이었다. 고무신은 엄지발가락 밑이 제일먼저 닿았다. 구멍이 나면 그곳에 과자봉지를 넣어 흙이나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발에 땀이 나면 미끄러워 신발이 벗겨지기 일쑤였다. 책보를 메고 다녔으며, 집에 전기가 없어 밥을 일찍 먹고 나면 들에서 뛰어 놀던 피곤함에 상다리 밑에 꼬꾸라져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살던 시절이 가까이 있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라면이 귀해 국수에 섞어 끊이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하나라도 더 건져 먹으려고 젓가락을 휘젓던 추억도 그때였지.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오랜 세월을 견뎌 온 것에 비해 건축물은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조선자본을 수탈한 일제의 잔재들 그 한가운데 「'나라를 잃었던 자들아 그날을 기억하라' 경술국치 1910. 8.29」 라고 적혀있는 프랑카드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한다.
경암 철길마을은 추억을 결정판이었다. 폐철로 변을 따라 낡은 주택들이 길게 자리 잡고 있고 늘어선 가게마다 라면땅과 쫀디기를 팔고 있었다. 교복에 완장을 차고, 불량학생처럼 옆구리에 책가방을 끼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이가 많은 노인부터 젊은 아이돌같은 학생들도 있었다. 나도 해보고 싶었는데 식구들이 말려서 구경만 했다.
동국사는 일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사찰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면 경사진 지붕이 건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대웅전은 여전히 고요하다. 종교는 건물도, 민족도, 인종도 뛰어 넘어 그냥 하나의 존재로 있을 뿐이다. 마당 한 귀퉁이의 종탑과, 꽃봉우리를 터트린 홍매화와 작은 화분의 자잘한 이름모를 들꽃과 뒤뜰 햇살아래 쪼그리고 누워 방문객의 발걸음이 눈을 간신히 떳다 외면하듯 다시 감는 오후의 삽살개와 고요한 대나무 숲의 곧은 성품도 모두 하나하나가 종교다. 그 속에 사물처럼 잠시 선 나도 종교다. 두 손을 합장하며 군에 간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노부모의 건강을 빌고, 딸과 아내의 기원도 덧붙인다. 기원은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 둘 자꾸 덧붙여 누더기가 된다. 되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안심이 된다.
고우당을 보니 히로쓰가옥은 더 볼 것도 없을 것 같았고, 돌아갈 시간도 되었다. 따뜻한 햇살 가득한 정원에 잠시 시간을 맡겨두고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보다 돌아 갈 시간을 고민했다. 귀가도 여행의 일부며 가끔은 집의 편안함이 떠올라 설레기까지 한다. 세 시가 넘었는데 딸을 서울로 데려다 주려니 겁이 났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할지. 딸이 양보해서 핸들을 돌려 집으로 향했고, 딸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이 지난 주말의 시간을 밟고 지나온 미래인거잖아.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소포클래스의 말이 떠오른다. 근대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 아닌가. 군산 여행은 잠들어 있던 나의 역사를 떠올려 보는 좋은 여행이었다.

덧붙이는 글 3월 마지막날 군산을 다녀왔다.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역사까지 될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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