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조기잡이 중 납북됐다가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납북어부 4명이 사건 발생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전주지법 형사1부는 2017년 10월 20일 반공법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살이를 한 정삼근(75·왼쪽 세 번째)씨와 김기태(77·왼쪽 두 번째)씨 등 영창호 선원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정씨 등 선원과 선원 가족들이 재심이 끝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날부터 그는 매일같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야 했다. 목욕물에 안티프라민을 얼마나 풀어 넣었는지 지독하게 파스 냄새가 났다. 그리고 잘 때마다 생소고기를 상처 부위에 붙여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썩은 듯한 소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 며칠간 치료 아닌 치료를 하고 운동을 시키더니 어느 날 이발과 면도를 시켜주었다. 검사나 판사 앞에서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옷을 입히고는 차에 태워 어디론가 갔다.
"삼근아, 오늘 집에 가는 날이다."그를 태운 차는 개야도를 향했다. 집에 간 것은 사실이나 귀가를 시켜줄 목적으로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현장검증을 하며 사진을 찍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깃발을 잡기도 하고, 무전기를 치는 모습을 하거나, 무인포스트를 만드는 모습을 재현하거나, 몰래 라디오를 듣는 모습을 재현해야 했다.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미친 듯이 수사관들에게 달려들었다.
"내 남편을 왜 잡아갔냐. 죄 없는 사람 잡아다가 왜 간첩을 만들었냐. 이 죽일 놈들아."악을 쓰던 아내는 쓰러졌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런데도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근처에 오려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큰 딸아이가 꼼짝도 않고 정신 나간 듯이 땅바닥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족을 뒤로 하고 그는 섬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며칠 뒤 검찰로 송치되었다.
"야, 삼근아, 오늘 검사한테 잠깐 들러야겠다.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검사가 뭐라도 물어보면 다 그렇다고 대답해라. 알겠지?" 그의 고문을 담당했던 이우철 수사관이 다시 다짐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군산검찰청으로 가서 대기실에 앉혀 놓더니 보안대 수사관과 검사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다.
"검사가 종이를 보면서 제가 보안대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그대로 불러주면서 맞죠? 맞죠? 이러면서 물어요. 보안대 수사관들이 뒤에서 딱 지키고 앉았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해요. 다 맞다고 해야죠. 그렇게 형식적으로 검사조사를 받고 수사관이 저를 데리고 나가더라구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야, 검사가 그러는데 너 교도소에 3일만 있으란다. 3일만 있으면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라' 그러는 거예요. 전 정말 3일만 있으면 풀려나는 줄 알았어요."3일은 거짓말이었다. 5년 6개월을 꼬박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3일이면 온다던 수사관을 미련스럽게 기다리던 어느 날 교도관에게 혹시 보안대 수사관이 안 왔느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이 양반아, 보안대 수사관이 여길 왜 찾아와. 당신 형기대로 살고 나가면 그때 가서 찾던가. 순진하네. 이 양반."그제서야 보안대 수사관한테 속은 것을 알았다. 5년 넘는 시간동안 매일처럼 그 이름을 외웠다.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혹시라도 그 이름을 잊어버릴까봐 매일 같이 적었다.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
집안이 발칵... 딸 아이 정신도 뒤집어졌다 차를 내오며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양반 교도소로 들어가고 나서 이 양반 간첩이라는 뉴스가 텔레비전에 크게 나와서 우리 동네사람들이 얼마나 놀랬다구요. 나하고 우리 새끼들은 동네에서 학교에서 다 따돌림을 당하고, 아이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니까요."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래서 그 수사관에게 복수하려고 다짐을 했던 건가요?"그도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억울했죠.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왜 안 들겠어요. 처음 출소하고 나서는 분노만 가득했어요. 그래도 실제 죽여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출소해서 집에 왔는데 큰 딸아이가 정신이 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녁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아이 참. "그가 보안대에 연행된 뒤 수사관들이 개야도 집에 여러 번 찾아와 가택수색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17살 정도 되는 큰 딸아이 혼자 있을 때 보안대 수사관들이 가택수색을 했다. 권총을 차고 군화를 신고 집안에 들어와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때 발칵 뒤집어진 것은 집안만이 아니었다. 큰 딸아이 정신도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그때 내 눈이 뒤집어 졌어요. 그때 그 수사관 새끼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새끼들이 다녀간 뒤로 실성해 버렸다니까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경찰이나 낯선 사람을 보면 무서워 숨어버려요.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정신을 놓았는지...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려서..."그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남편 찾는다고 군산 나간 동안 일이 벌어졌어요.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는 큰 딸아이가 저리 될 때까지 뭘 했냐고 하는데 나라고 왜 안 억울하겠어요. 그래도 다 내 책임인 것만 같아서..."조사가 끝나고 미역국에 젓갈반찬 가득한 점심상을 받았다.
"소고기 썩는 냄새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기를 안 먹게 되더라구요. 여기 김이랑 미역, 우리가 직접 딴 거라 맛있어요. 젓갈도 맛나고. 어서 드세요."상을 차려준 아내는 작은 상을 다시 차려 작은 골방으로 가져간다. 아마도 큰딸의 밥상이리라.
세상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의 염원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뜻을 모을 때 비로소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세상의 변화이다. 그러나 국가폭력피해자들을 만나다 보면 이렇게 파괴되는 개인의 상처까지 세상이 관심을 가져줄까 하는 고민이 항상 든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다른 이의 개인적인 아픔까지 공감해줄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정삼근은 |
정삼근은 1943년 전북 군산시 개야도에서 2남으로 출생하였다. 집안에서는 그를 정남전, 정채근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학비난으로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없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어렸지만 조류를 잘 읽고 기계 다루는 것이 능숙해 일찍부터 기관장을 맡았다. 북한군에게 납치될 당시에도 그는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어로작업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19살의 그가 납북되어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때 일이다.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술기운을 빌어 집에 돌려보내주지 않는 북한 사람들에게 술병을 깨뜨리며 주먹다짐을 하는 등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북한에서의 억류생활이 고됐다고 한다.
2006년 정삼근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자신의 억울함을 진정했고 2007년 위원회는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그리고 2009년 재심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7년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던 것보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상처받은 것에 아직도 분노하고 있다. 새벽 4시경 바다양식장에 나가기 전, 그는 커다란 유리잔에 소주 한잔을 가득 부어 마시고 일을 시작한다. 일을 하는 중간에도 2홉 소주를 한병씩 마신다. 돌아와서도 역시나 커다란 유리잔에 소주 한잔을 가득 부어 마시고 잔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도 아내와 개야도 섬에서 양식장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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