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입국거부되어 추방된뒤 인천공항에서 만난 오재선
변상철
그는 1956년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살고있는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는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방공장에서 일하길 원했다. 어렵사리 대한민국 민단(대한민국을 지지하며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 조직)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아버지는 학비를 대주지 않았다.
결국 학비 문제로 학교를 자퇴하고 아버지 뜻대로 가방공장에 입사했다. 그에게 가방공장 일이 즐거울 리 없었다.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일본 학교는 차별이 심하니 다니기가 어려워 한국거류민단이 운영하는 한국 학원에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부친이 학비를 안 대주니 학교를 다닐 수가 없는 거예요."가방공장을 다니던 그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들은 양가 가족의 여러 가지 차별과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했다. 불안한 출발이었기에 그는 더욱 인정받고 싶었다.
"1970년도에 처가가 가까운 사이타마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불고기 집에 취업해 주방장으로 일했습니다. 일본식 불고기 집이었는데 제가 나름 양념을 개발해 특제소스를 만들었어요. 조선간장에 일본간장을 적당히 섞어서 너무 짜지도, 그렇다고 달지도 않게 하고, 특히 뒷맛이 텁텁하지 않도록 배나 양파, 우메보시 양념을 적당히 섞었어요. 그 소스맛 때문인지 불고기 집에 손님이 끊이질 않았었죠."그런데 그렇게 장사가 잘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입소문이 나고 손님이 많이 늘었죠. 그런데 단골손님들 중 야마구치파 야쿠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자주 찾아와서 요리를 먹곤 했는데 그들과 친해지게 되었죠. 무척 가까워진 뒤에 그들과 함께 제주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제주 출신이니 안내도 할 겸 함께 가자는 제안을 수락하고 제주를 다녀왔죠."단순 관광인 줄 알았던 그 여행은 사실 야쿠자들이 한국에 마약을 판매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마약을 거래했고, 관광인 줄 알고 따라갔던 오재선은 일본에 돌아와서 항의하며 다투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자신들과 함께 야쿠자 조직에서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식당 조리사로서 일하면서는 절대 만져볼 수 없는 거액의 금액을 제안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하다 그 제안을 수락했다. 돈을 벌어 처가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사이타마의 야쿠자가 되었다. 상가와 파친코 업장을 관리했다.
그런데 자신이 속했던 야마구치 파에서 각성제를 취급한 것이 경찰에 적발되었다. 그가 모든 혐의를 뒤집어 쓰면 가족의 뒤를 보살펴 준다는 조직의 말을 믿고 그는 감옥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각성제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일로 그는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그 말을 믿고 들어간 내가 미친놈이지요. 징역을 살고 나오니 몸도 마음도 망가졌어요. 몸을 추스르고 야쿠자와도 손을 끊을 생각에 동경으로 도망쳐와 친척이 소개해준 병원에 몇 달간 입원해 있었어요. 소개해준 친척이 치료비도 내주었기 때문에 저는 고마운 마음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었어요. 치료 받는 동안 그곳에서 마음 좋은 간호사도 만났어요. 퇴원해서는 간호사와 함께 지내며 행복하게 지냈지요. 그러다가 출입국관리국에 검거되어 강제송환되었죠."야쿠자에서 간첩으로그렇게 강제송환되어 1982년 3월경 제주에 돌아온 그는 지인의 주선으로 평화목장에서 마부로 일하며 지냈다. 산간에서 말을 돌보며 몸도 조금씩 좋아졌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5년 6월경 제주경찰서 대공과 수사관들에게 영장도 없이 연행된 것이다.
"제가 동경에서 입원했던 동일병원의 원장이 조총련 회원이었다나 봐요. 그래서 그곳에 조총련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하나보더라고요. 제가 어찌 알겠어요. 병원장이 조총련인지 간첩인지 제가 어찌 알고 입원했겠습니까? 그런데 경찰에서는 제가 지령을 받을 목적으로 그 병원에 입원했다는 거죠."
야쿠자 활동을 했던 그는 재일교포 사회를 전혀 알지 못했다. 더욱이 조총련과 민단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수사관들로부터 더욱 모진 고문을 당했다.
"조총련이 뭔지, 지령이 뭔지, 간첩이 뭔지도 모르니까 수사관들이 지령사항을 말해라, 국가기밀을 탐지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데 하나도 알아듣질 못해요. 그래서 더 맞았죠."그가 기억하는 고문은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몽둥이로 엉덩이와 어깨 등을 사정없이 맞았어요. 겁에 질려 소변이 급하다고 했더니 수사관 한 명이 옷에 그냥 싸라고 윽박 질렀어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다른 수사관이 갈아입힐 옷이 없다며 저를 화장실로 데려갔죠. 용변을 보는 동안 문을 열어 놓고 감시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 동안 받은 고문 수사 끝에 그는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7년을 복역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던 내가 입을 뗐다.
"그럼 이번에 일본에서 입국 거부되어 다시 돌아온 이유가 각성제 위반 사실 때문인가요?""예,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각성제법을 위반한 사람은 영구적으로 입국이 거부된답니다."허탈했다. 왜 나에게 숨겼을까?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진작 그런 말을 안 해주셨어요? 그럼 출입국이 가능한지 미리 알아볼 수 있었잖아요."그는 나에게 자신의 과거 일부를 숨겼다.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신감에 더 화가 났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다. 앞으로의 일을 수습해야 했다.
"일본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이 함께 가지 않으면 제가 누구인줄 알고 만나 주겠어요?"그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와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란 과거 수사기록에 기재된 내용 중 그에게 지령을 전달했다는 재일교포의 주소밖에 없었다. 그 주소 하나를 가지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달리 선택도 없었다.
가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에게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주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공항을 떠났다.
나홀로 일본행다음 날 제주로 떠난 그를 뒤로 하고 나는 홀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일본 동경에 도착한 나는 수사기록에 기재된 재일교포 친척을 찾아갔다. 집 입구에서 기웃기웃 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일본 말로 말을 걸었다.
당황한 나는 무심코 뒤돌아서며 엉겹결에 '죄송합니다'라는 한국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6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뜻밖에 한국어 답변이 돌아왔다.
"누구십니까?"돌아온 대답이 한국어로 들리는 순간 고민하던 문제의 정답을 찾아낸 것 마냥 너무 기뻤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곳에 온 이유를 듣고는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1층은 공장이고 필로티 구조로 된 2층에 가정집이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따라준 우롱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