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질책으로 피어나는 겨울 눈꽃

[리뷰] 다시 읽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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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영(woodway)등록 2018.01.12 22:41

분신하는 전태일(홍경인 분) 전태일의 분신은 결코 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 대우시네마


온 누리를 덮어주는 눈이 순결한 몸짓들로 소복하게 내려앉더니, 앙상한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난다. 캄캄한 밤일수록 별이 빛나는 것처럼 눈은 이 땅의 더러운 곳까지 가리고 덮어주기에 내 마음도 한결 따스해진다. 만약 어떤 정결한 영혼들이 이 세상을 떠나 흰 눈이 되었다면 그 중 전태일(홍경인 분)의 영혼도 반드시 뜨거운 질책으로 다시 피어나는 겨울 눈꽃이리라.

흑백 화면은 으레 추억과 회상의 몫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수배 중인 노동운동가 김영수(문성근 분)의 시선 끝에 펼쳐지는 흑백 화면은 분명 군더더기 없는, 그래서 값싼 감상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생생한 현재적 의미로서의 진실을 말해 주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군용 지프가 요란하게 달리는 통행금지 직후의 시간에, 자신은 낮에 버스비를 털어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었기 때문에 걸어서 집을 향해 뛰어가는, 그러나 관객들을 향해 달려오는 한 청년의 모습은 아련한 60년대의 회상이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을 향해 묻는 의문 부호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배고프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한 시인의 양심의 예리함이 곧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순교자의 의지로 이어졌듯이 타인의 고통에 정말로 가슴 아파하며, 시대의 모순에 고뇌했던 한 청년 노동자의 영혼은 참으로 오랜 기간을 두고 망설여 왔던 그 불꽃같은 희생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또 남겨두고, 그는 마치 어떤 시인의 말처럼 '성자'(聖者)가 되어 떠난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순결한 영혼은 있었구나 하는 위로와 함께,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말이다.

수배중인 노동운동가 김영수(문성근 분) 김영수는 현실에서 우리는 전태일을 다시 만나게 된다. ⓒ 대우시네마


우리는 늘 마음속에 '성자(聖者)'를 그리워한다. 그만큼 자신이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어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실로 불꽃같은 전태일의 삶은 번개 같은 충격이다. 7,554명의 제작자, 그를 잊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 영화는 분명 뜨거운 연대(連帶)의 기록인 것이다. 마치 어두운 하늘에 춤을 추는 눈송이들처럼 전태일은 그를 뒤따르는 엄숙한 행렬의 합창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지 않는가.

그가 세상을 떠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이제 순결한 양심을 회복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검붉은 피를 토하며 공장에서 쫓겨나 죽은 한 미싱사의 비참한 인생이 전태일의 삶을 흔들었듯이, 과연 이제 보니 평화시장, 환풍기도 없는 그 다락공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바로 우리의 형제들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서 멋모르고 우쭐댄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울 뿐이다.

노동청 근로감독관의 손에 휴지가 되고마는 근로개선 진정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참혹한 진실이었지만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온 것이다. 더불어 잘사는 사회가 아닌 권력을 잡은 자와 더 가진 자의 부를 늘리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최저의 권리마저 빼앗은 것에 분명한 것이다. 노조를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온몸에 구타를 당한 여공의 모습과 도망 다니는 김영수의 모습 또한 컬러 화면 속에 너무나 전근대적인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비쳐지는 것을 어찌하랴.

지하철 정류장에서 감시의 눈을 피해 계속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라는 아이를 임신한 아내의 얼굴을 순식간에 스치는 차창 밖으로 비로소 신문을 내리고 보아야만 했던 김영수의 얼굴은 분명 또다른 우리의 얼굴이지 않았는가. 과거 속에 겹쳐지는 80년대의 노동 현실은 깨어있는 자에겐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전태일 전태일의 삶은 생존과 부조리한 현실과의 투쟁이었다. ⓒ 대우시네마


그러나 그는 천천히 전태일의 얼굴을 응시하게 된다. 삼각산 신축 공사장에서 종일 비를 맞으며 철근을 들어 나르는 젊은 근육의 움직임에서, 시대의 어둠이라는 빗줄기에 맞서는 당당한 영혼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누울 자리를 파고 온몸에 비를 맞으며 하늘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들려주는 전태일의 독백은 분신 장면과 함께 이 영화의 압권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카타르시스(淨化)로서 차분하면서도 비장감 넘치는 비극의 절정으로 데려가면서 또한 나에게도 진정한 삶의 태도를 묻고 있었다.

"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온몸에 석유를 붓고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는 전태일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하다. 발끝까지 적셔가는 동안 나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그러나 이제 전태일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어두운 계단의 끝에 밝은 햇살이 비칠 때, 사람들은 제각기 발길을 옮길 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근로기준법 책 -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래서 화형을 당해야 하는 - 에 불이 붙는다. 바람이 그의 영혼을 휘감고 만다. 흑백 화면에서 컬러 화면으로 옮겨지면서 불덩어리가 된 전태일은 나에게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온다. 과거의 기억이 비로소 현재의 의미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90년대의 음악이 흐르고 김영수는 평화시장 골목에 앉아 있다.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 중에 청바지를 입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손에 자신의 책이 들려 있음을 본다. 그는 복잡한 사람들 틈으로 멀어져 간다. 그가 뒤를 돌아다본다. 전태일의 얼굴이 겹쳐진다. 미소를 보낸다.

분명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부활한 것이다. 아직도 봄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겨울 눈꽃이 되어.

감독: 박광수, 주연: 문성근,홍경인, 상영시간: 1시간 36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 대우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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