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영화리뷰: 연희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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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빈(qls321)등록 2018.01.08 18:11
나는 꽤나 심사가 뒤틀린 인간이다. 소위 "꼬였다"던가 "프로불편러"라는 표현이 내 옷처럼 전신을 휘감아 내리는 사람이랄까. 덕분에 화병을 달고 산다. 어느날 부터 우스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말문이 막히는 순간, 가슴팍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친다. 기가 막힌다고 하나? 할 말은 잃었지만 무언가를 표현해야 하는 순간 가슴 언저리에 맺힌 말들을 털어내려는 듯 가슴을 쿵쿵 때린다.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는 멋쩍은 듯 허허 웃어버리고 말지만 피곤해지는 것이 싫을 뿐이다. 허허 웃어버리고 마니 방문을 닫아걸고 가슴을 탕탕 치는 일이 부쩍 많아지는 요즘이다.

며칠 전 또 한 번 가슴을 두드렸다. 제발 밖으로 나오라고. 이만하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쉬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영화 <1987(장준환 감독)>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영화는 386세대라 일컫는 이들의 영웅성을 부각하지 않았다. 그 점은 좋았다. 소위 ㅇㅇㅇ사건이라던가 ㅇㅇㅇ항쟁, ㅇㅇㅇ혁명 등 후세에 의해 해석되고 명명된 거창한 역사가 아닌 순간순간의 단편을 그려냈다. 그 점도 좋았다. 대의를 외치며 서사를 이끌어가려는 욕심쟁이도 없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때를 알고 떠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독재와 폭력의 시대를 살아 낸 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시대를 아울러 어디에나, 언제나 있음 직한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에 위로받았다.

허나, 영화관을 나서는 나는 역시나 꼬인 인간이다.

'연희(김태리)'는 왜 그런 인간인가? 어차피 그 당시 있지도 않던 가상의 인물을 영화 속에 꽂아 두고 감독은 "그래도 여자한테 한자리 줘야지! '양성평등'의 시대에." 했을까? 여자주인공이 등장하니 이 정도면 퍽 젠더감수성 넘치는 감독이라 자신을 포장했을까? 어차피 역사는 기득권의 눈으로 기록되는 것이니 영화가 남자들의 이야기인 것에 화를 낼 생각은 없다. 물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목격하고, 가슴과 머리로 더 나은 삶을 그리며 거리로 나선 뭇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지워졌을지라도 그것은 영화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만 연희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뒤틀린 역사의 기억을 뒤바꿀 수는 없더라도, 연희를 통해 그려낸 여성의 모습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감독은 연희가 당시를 살아가던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존재라 했다. 그러니 가상의 인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도 말했다. 지난날의 많은 사람이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수동적인 존재였을지언정 영화 속 연희는 여전히 여성이다. 수동적이고, 연약하며, 개발되어야 하고 발전시켜야 할 존재.

영화 속 연희라는 여인의 성장 서사는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의미를 부정하지 못한다. 대학 새내기 연희는 운동권을 가까이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다. 되도록 데모 같은 일에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 시대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일보다는 당장 오늘 오후에 잡힌 빵집 미팅이 더 중요하다. 원치 않게 시위에 휘말린 연희는 처음 보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백골단의 추격을 따돌렸고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홀려 동아리 행사에 발을 들인다. 잘 생기고 의식 있는 선배는 끊임없이 연희를 설득하지만, 연희는 여전히 두렵다. 결국, 연희를 움직인 것은 멋지고 친절한 데다 서로 오묘한 감정까지 나눈 선배의 죽음이다. 그조차도 연희가 선배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인지, 혹은 이제는 겁쟁이처럼 숨어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서 거리로 뛰쳐나간 것인지 분명치 않다. 멋진 선배가 없었다면 연희의 서사는 불가능하다. 연희는 대다수 영화에서 소비되는 '연약한 민폐 여자주인공'에서 '민폐'만 운 좋게 덜어낸 여자 주인공에 불과하다. 설사 감독의 말대로 연희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한들 감독의 의식과 무의식 속 지독히도 깊은 곳에 뿌리박힌 '나약하고 수동적인 존재: 여성, 강인하고 진취적인 존재: 남성'이라는 도식을 불식시키지는 못한다. 영화를 보고 며칠 뒤, <1987>이 여성을 지우지 않았다는 한 평론가의 글을 보았다. 연희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리면 그만인 것일까? 역사가 지워버린 수많은 여성이 도처에서 자신의 기억을 가숨에 묻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만을 쏟아내는 내게 친구는 영화산업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쩌면 연희는 한국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투자자들의 입맛에 맞춰야만 영화가 제작될 수 있으니 연희는 적극적이고 '드센 여자'여서는 안되었던 거라고. 삭막하고 팍팍한 남자 이야기에 조미료가 필요하니 눈요기로 예쁜 여배우 하나가 들어가야 했을 거고 투자의 조건이 잘 버무려진 결과가 연희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나는 이제 내가 어디서부터 불편해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세상이 너무 크고 쌓인 시간의 겹이 헤아릴 수 없이 두터우니 오늘 밤도 있는 힘껏 가슴 탕탕 치고 깊은 숨 한번에 씁쓸함을 몰아낸 뒤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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