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예술(퍼포먼스 아트)전에 영상예술(비디오아트)이 웬 말이냐?

‘몸으로 쓴’ 전시에 ‘머리로 쓴’ 작품들을 초대한 무지의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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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발(gurqkf)등록 2018.01.04 15:42
'한국 행위예술 50년 기념전'이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역사를 몸으로 쓰다]전을 찾았다. 전시공간 연출은 좋았으나 작가와 작품 선정에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기획자는 서문에서 "퍼포먼스 작업을 조명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분류에 의하면 38개팀 중에서 11개 팀은 행위작품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본다. 그중 9개의 팀은 영상예술이다. 어떻게 영상작업과 퍼포먼스아트를 구분하지 못하는가?
15년 전쯤 사람들을 세워놓고 얼굴에 물감을 뿌리는 행위를 저속으로 찍은 비디오아트를 본 적이 있다. 물감이 오기 전에 미리 얼굴이 찌그러지는 그 영상을 보며 감명을 받았었는데 이 작품의 전시명에는 '비디오아트'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우 퍼포먼스적인데도 이 작가는 이것을 영상작업으로 생각한 것이다.
김성환의 <진흙 개기> 작품은 퍼포먼스적 요소가 담긴 영상예술, 실험영화, 온갖 장중한 이야기를 버무려 놓은 '영화'다. 박찬경의 <소년병>은 그냥 영상작업이고 단편영화이다. 영상작업은 연출자가 '몸으로 쓴'게 아니라 '머리로 쓴' 것이다. 연출하고, 연기하고, 편집된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경호원들>은 단지 영상이 들어간 설치작업일 뿐이다. 약간 개념적인 영상설치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는 몸이 빠져 있고, 당연히 작가의 몸도 없다. 몸이 주제인 전시에 몸은 없고, 머리만 있는 것이다. 행위작업에서의 '실연'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몸이 빠진' 매우 개념적인 행위작업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영상작업이나 설치작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영상작품들 자리에 스스로를 바늘이라는 가정 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김수자의 <바늘여인>작품이나 장어가 꿈틀대는 요강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나체로 오줌을 누는 행위를 영상화한 장지아의 <앉아있는 소녀>작품을 앉히는 게 그나마 적당하다.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존재를 자각하는 몸짓으로 '현존성'을 충족시키며 작업한 잭슨 폴록의 작업을 행위작업이라 칭하지 않는다. 행위미술로 명명될 때에는 행위미술작업의 요소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일회성, 우연성, 즉흥성, 현장성, 현존성, 실연성, 참여성, 총체성 등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충족돼야 행위미술로 명명될 수 있다.
행위미술에서 '실연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반복 훈련된 공연이나 연기가 아닌 실연은 행위미술의 여러 요소들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바로 그 순간의 현장, 그 존재의 자각과 동시에 이뤄지는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울림이 예술적 언어가 되고 그 언어가 관람객과 교감되면 하나의 행위예술작품이 탄생되는 것이다. 이것은 반복연습의 공연작품이나 연출에 의한 연기가 따라올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행위미술은 질곡의 삶 중심에서 온 몸으로 예술을 하는 것이고, 역사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 행위예술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작업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영상작업은 물론이고 연극과 무용작업이 행위예술이라는 판에 같이 오를 수 없는 것이다. 남화연의 작업도 행위미술이라 할 수 없다. 기획자의 글에서도 "뮤직비디오의 형식"으로 "유튜브를 통해 유통시키는"이라 적고 있듯이 이 작품은 영상화된 무용일 뿐이다.
이러한 작품보다 수백 개의 탁구공이 무대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홍승엽의 작품, 스스로의 작업을 '댄스퍼포먼스'라 부른 김현옥 무용가의 쌀 담긴 켜를 흔드는 매우 퍼포먼스적인 무용작품이 떠오른다. 둘 다 소리를 작업에 끌어들인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소리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작가로 소개하며 초대된 임민욱과 삼손 영의 작업은 소리를 이용한 개념적 설치미술 작업이다. 이 작가들의 자리에 음악, 소리를 이용한 퍼포먼스 작업을 해 온 어어부프로젝트의 백현진, 있다, 소니아 같은 작가들이 앉아야 한다. 백현진은 1995년 [뼈]전에서 물을 입 안에 넣어 소리를 내다 뱉는 노래 퍼포먼스를 하였으며 2016년 자신의 개인전에서 2시간 정도의 사운드 퍼포먼스를 하였다.
전시공간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한 '공동체를 퍼포밍하다' 구역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도 퍼포먼스 작품이 아니라 실험무용 같은 작품이 3팀이나 있었다. 여러 사람의 등장만으로 공동체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이라 우겨대는 꼴이다.
여기에도 눈 덮인 산에서 누드 남녀가 뛰어 다니거나 층층이 누드를 쌓아 올린 무세중의
작품이 들어가도 손색이 없다.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도 참여시켰는데 정말 참담한 작가선정이다. 영상 안에 퍼포먼스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렇게 퍼포먼스 작품전에 초대된다면 사람이 등장하며 약간이라도 예술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영상작업자들은 모두 퍼포먼스 작가가 돼야 한다.
타 장르 작가 중에서 퍼포먼스 작업을 선정하려면 한 시간 동안 1미터를 움직이는 작업을 한 마임이스트 유진규를 모셔야하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스물네 명의 사람들이 광장에서 각자 한 시간씩 아무 짓이나 하는 릴레이 퍼포먼스(<나의 시대에 고함>, 2014)를 연출한 연출가 이경성을 모셔야 한다.

아이 웨이웨이의 <한나라 도자기 떨어뜨리기>, 타나카 코키의 <모든 것은 모든 것이다> 수준 정도의 작품은 국내에 즐비하다. 김석환의 <현대인의 저녁식사>, 안치인의 <바람>, 물을 마시며 동시에 오줌을 누는 방효성의 <몸>, 심홍재의 <베개 일기>, 김광철의 <메모리 로드>, 회로도의 <씨발세탁소>, 정영민의 <먹물로 계룡산을 그리다>, 김은미의 <걸레> 등 걸작들이 넘쳐나는데, 우리나라 80년대 이후 작업은 전혀 소개하지 않고 행위작업이 미천한 '옥인 콜렉티브'나 영상작가, 설치작가, 무용가를 선정하는 교만과 오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몇 십년간 행위작업에 매진해온 작가들의 노고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은 치명적 실수이고 좀 더 과장하면 고의적 누락 범죄가 될 수 있다.
37년간의 작가들이 배제된 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위작업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퍼트린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영향력이 큰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런 오류는 엎질러진 물 마냥 미술역사에 대한 엄청난 과오라 아니할 수 없다. 10년 전, [행위미술 40주년 기념전]에서 90년대 이후 주요작가들을 다 배제하고 낸시랭의 패션쇼 런칭 작품, 김아타 사진 작품을 선정한 것에 대해 문제를 지적했으나 10년 후에도 이렇게 똑같이 오류가 반복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서인가? 반성하라!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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