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빌어 먹는 독립 운동 하지마라"

백년을 떠 도는 고려인들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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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중(sjjohn)등록 2017.12.21 17:46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선생 1908년 의병대를 이끌다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이 생기고 처음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 왕산 기념관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은 1900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에 근거를 두고 일제와 여러차례의 독립전쟁을 수행한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지역에서 독립운동사상 전무후무한 대첩을 거두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석들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2차 대규모 한인 이주가 시작되고 함경도 일대뿐만이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연해주로 독립 운동가들이 몰려들었다.

친일세력이 찬동한 경술국치를 조선의 인민과 지성인들은 인정할 수 없다며 성명회를 조직하고 세계에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어 수많은 의병과 대한광복군, 독립군을 두만강 넘어 조선으로 보내고 상해 임시정부보다 앞서는 최초의 임시정부 국민의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조선과 연해주에 맞닿은 두만강 일대를 독립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만들고 교육을 통한 한인사회의 민족의식화를 촉진함으로써 연해주 지역을 명실상부한 대륙 한인사의 중심지, 독립운동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독립군들

만주벌판과 시베리아벌판을 달리며 일신과 가문의 안녕을 뒤로한 대다수 독립운동가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은 몰락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가슴속에 품은 자부심만으로 가난의 벽을 넘기는 어려웠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은 교육에까지 여력이 미치지 않았고 가난의 대물림은 3, 4대를 이어갔다.

자료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유족 6283명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고, 봉급생활자는 10% 남짓이며, 중졸 이하 학력이 55% 이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산다. 일부는 친일파 후손에 밀려 외국으로 피했고,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이었고, 가난은 의료와 교육의 공백을 낳고, 다시 가난으로 대물림됐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공식은 철저히 들어맞았다.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후손은 선대의 부와 명예를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독립유공자 자손은 선대의 가난과 피해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는 게 현실이다.

몇해전 "친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관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OO의원의 부친이 일제때 역시 헌병을 지냈고, 정OO의원의 부친은 일제때 면서기를 하였으며  김OO의원은 할아버지의 날조된 독립운동사를 조작하여 말썽이 되고 있다는 기사도 접했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부모의 잘못으로 그자식이 불이익을 받는 연좌제 성격의 매도에 당혹스러움도 느끼며 나라를 잃은 통치자의 잘못으로 그렇게라도 살아야만 했던 민초들의 아픈역사를 들추어서 뭘 어떡하자는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

소문의 진실여부를 떠나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 직접 지켜 보면서 한국에서 일고 있는 친일문제에 대해 자연히 민감할수밖에 없고, 따라서 침묵하고 있는것은 죄악이라 생각되여 이글을 적는다.

부친들의 친일행적 덕분에 정말 3대가 떵떵거리며 살아온 사람들이 아이러니칼하게도 자신들의 과거는 숨기고 친일행적을 조사하는데 선봉이 되고, 일본헌병놈들에게 끌려 꽃다운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간 한국정신대단체를 주도하여 정신대 할머니를 두번울린 사람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허위. 날조된 가족의 독립운동사를 만들어 물의를 일으킨 자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주도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인 중앙아시아에서 지켜 보았다.

이곳 키르키즈스탄은 역사적으로 많은 카레이스키들이 망국의 한을 안고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하신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강제이주당하여 100년을 넘게 아직도 정착하지 못한 체 떠돌아 다니고 있는 곳으로 역사의 비극적인 현장에서 느끼는 감회는 더 하다.

왕산 허위선생의 손자인 허 블라디미르 한국국적을 취득했지만 끝내 한국생활에 적응하지못하고 다시 키르기즈로 돌아왔다 ⓒ 전상중


내가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들...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왕산 허위선생의 손자를 처음 만난 것은 키르기스스탄에서 2004년5월16일로 기억된다.
이 나라 언론에 어떤 이유로 필자가 소개되면서 '허/블라지슬라브"는 색바랜 수첩을 들고 내사무실을 처음 찾아왔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을 "허위"의 손자라고 밝혔다.
"왕산 허위선생...." 
난 처음에 그가 누구인지...어떤 인물인지를 솔직히 알지 못했다.
그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제1호로 순국하신 분으로 안중근의사가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바로 그분이며 서울 동대문의 "왕산로"라는 거리는 그의 호를 따서 만든 거리이다.

허위선생이 장렬하게 순국하신 후에 허위선생의 가족들은 큰아들 허학과 작은 아들 허국이 일본의 압제에 견디지못하고 1920년대에 중국 동북지방으로 망명하여 살다가 다시 러시아로 이주했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에 떠밀려 우즈베키스탄으로...다시 러시아로...북한으로...중국으로...키르키즈스탄으로 모두 흩어져서 살고 있다.

키르키즈스탄의 비쉬켁에 살고있는 허위선생의 손자는 둘째아들인 "허국"의 아들인 "허 블라디슬라브"로 1951년생이며 지질학자로 일하다가 소련체제붕괴후에 먹고 살길을 찾느라고 당시에 낡은 트럭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거창하게 친일운동과 항일운동의 공과사를 따지지도 않았고 다만, 그의 간절한 소망은 "잘 사는 할배나라에가서 그저 일거리나 하나 얻었으면..."하는 아주 원초적인 소망...끼니걱정하는 그것뿐이였다.
이후 한국언론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여 2006년 10월9일 한국정부로 부터 국적 취득을 완료시켰다.

금뱃지를 달고 민족정기가 어쩌구 저쩌고 하는 저들과는 아주 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한,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초라한 독립운동가후손의 모습과.... 부친의 친일행적을 속이고 3대가 떵떵거리며 살아 온....금뱃지를 단 위선자들의 언행을 보면서 괜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풍비박살난 대륙의 영혼,최재형선생
상해임시정부시절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선생은 러시아 한인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으나 자신의 모든 재산을 조국독립운동에 바치고 1920년 4월5일 체포된 후 재판없이 하루만에 총살당한 후 故안중근의사 처럼 매장지도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아직껏 모르며 그 자식들도 최재형이 죽은 뒤로는 가장 비참하게 살았다.
큰 아들 최 뽀토르는 1919년 서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둘째 아들 최 빠벨 뻬뜨로브나(최선학)은 일본 간첩으로 자인할 것을 강요당하다 예심원들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대하다 싸움이 시작되어 달려온 내무인민위원부 직원들이 그를 구타당해 숨졌다.

최 류보비 뻬뜨로브나(결혼하여 남편 성을 따라 니 류보비 뻬뜨로브나)는 국가 은행 회계원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최 발렌찐 뻬뜨로비치는 강제이주되어 1938년 알마아따에서 체포되여1992년 2월 사망했고. 최재형의 사위 5명이나 총살당했으며.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처형당했다.
3대가 아닌 4~5대가 폭삭망해버린 비운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야기를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면서 세치혓바닥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사악한 무리들의 위선적인 언행들을 도저히 참을수없어 이글을 올린다.

안중근 의사와 최재형 상해 임시 정부 재무부장관 블라디보스톡에서 사업에 성공한 거부 최재형은 찾아온 안중근 의사를 지원하며 거사를 지원했고 안중근의사 처형후 그가족들을 돌봤고 전재산을 헌납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일본에 의해 총살되였다. ⓒ 전상중


무엇이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이며, 누가 그일을 한단 말인가?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일본놈들에게 처절한 최후를 마치신 "허위"선생과 "최재형"선생이 아니더라더도 많은 애국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이꼬라지를 보신다면 3대.4대.5대가 폭삭망해버린 후손들의 안위보다는 아직도 이나라의 장래를 더 염려하실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스쿨을 지날때마다  상해임시정부 재무부장관을 지낸 '최재형'선생의 따님이신 '루드밀라'의 초라한 음택이 늘 가슴에 걸린다.
이국만리 외롭고도 처진 땅...
누구하나 돌보지 않은 이땅에서 초라한 팻말하나만이 달랑 그녀의 존재를 말해줄 뿐, 나라를 위해 가산을 탕진하고 9남매가  맞아죽고 총살하고 옥살이한 이 혹독한 역사를 모르기에 아직도 내가 부르는 아리랑은 끝나지않았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에는 봉오동,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  불라디보스톡에서 한인들이 내던 <권업신문 >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썼던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계봉우 선생,
간도 일대에서 '철혈광복단'이라는 무장독립단체를 만들어 일본군과 직접 맞선 독립군인 최계립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알마티, 끄즐오르다, 심텐트,등지에 살고 있지만 한결같이 그들의 삶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다시 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다면  누가 독립운동을 다시 하려고 할것인가 하는 역설적인 의미로 "독립운동 하지마라"는 제목을 달아 봤는데 ...비애국자인가?

<다음호는 마지막으로 '다시 쓰는 아리랑"이 연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호는 마지막으로 '다시 쓰는 아리랑"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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