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조세희가 지금도 촌스럽지 않은 이유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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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록(kim2001kt)등록 2017.11.23 13:57
<침묵의 뿌리>를 소개할게. 들어본 적이 없다고? 좋아, 그럼 조세희는 알아? 들어는 봤다고? 조세희를 모른다고 해도 이건 알겠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침묵의 뿌리>(조세희, 열화당, 1985)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의 사진‧산문집이야.

<침묵의 뿌리>는 '난장이 연작'을 발표하고 10년 후에 나온 책이야. '난장이 연작'에서 조세희는 가난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목했지. 이 책에서도 그의 관심은 같아. 다른 게 있다면 문제의식이 심화됐다고 할까?

<침묵의 뿌리> 조세희, 열화당, 1985 ⓒ 열화당


저자는 지구 한 켠에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매일 밤 과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음식을 못 먹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나라가 있는 반면, 배 터지게 먹고 비만을 걱정하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한탄하지.

저자는 극심한 국내 빈부격차에도 문제를 제기해. 1976년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는 한 시간 일하면 평균 0.46달러를 받았어. 이건 외국 노동자 임금의 10~20퍼센트 정도였지. 다음 해인 1977년에 한국 어느 그룹 회장은 78억 원의 개인 소득을 올렸대. 그다음 해엔 240억 원을 기록했고.

시멘트 다리 밑으로 고리 지은 줄을 내려 목을 맨 남쪽 도시의 한 노동자는 1년 내내 일을 해도 60만원을 벌 수 없었다. … 1978년에 2백 40억원의 개인소득을 올렸던 노인 … 과 젊은 나이에 죽은 남쪽 도시의 한 노동자 사이에는 4만 4, 5 천 배의 소득 격차가 있었다. (62쪽)

저자는 지나친 노동시간을 지적하기도 해. 1976년에 국제노동기구(ILO)는 세계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발표했어. 한국 노동자 주당 근로시간은 52.6시간이었어. 미국은 40.4, 이스라엘은 40.5, 일본은 41.4, 캐나다는 38.5 시간이었대. 1985년에는 54.4시간으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가 됐지.

저자의 지적은 30년이 넘게 지난 이야기가 아니냐고? OECD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으로 멕시코에 이어 2등이야. 전체 평균보다 305시간 길지.

누구나 달라진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저녁놀을 받고 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기품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는 못하더라도 양곡과 연탄의 지급량을 올리고 어느 정도의 영양가를 지닌 부식이 이따금이라도 좋으니 그 어른의 식탁에 올라가게는 해야 한다. 그리고 21세기 중반, 즉 2050년이나 2060년까지 살 수 있는 젊은이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134쪽)

능력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힘 센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적당하게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바로 짚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좋은 희망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34쪽)

저자는 왜 책 제목을 '침묵의 뿌리'라고 했을까? 누구는 쉬지 않고 일해도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고 자괴감에 목숨을 끊는 반면 누구는 몇 백억씩 벌어들이는 현실. 그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저자는 묻는 거지. 뭔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침묵의 뿌리'는 어디냐고. 저자는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하며 책을 마쳐.

인간다운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또는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저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263쪽)

어때, 내가 왜 30년도 더 된 <침묵의 뿌리>를 가져왔는지 알겠지? 30년 전에 저자가 제기한 문제가 아직도 의미 있기 때문이야. 이 책은 조세희의 한국사회 비판으로 읽어도 좋지만, 사북 어린이들의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해. 저자는 사북 어린이들이 쓴 글을 보고 숨죽여 울었대.

<침묵의 뿌리> 143쪽, 1984.7 사북 ⓒ 조세희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는 탄광촌이 있었어. 당시 사북에는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이는 거의 없었대. 어린이들은 부모를 따라 농촌에서, 어촌에서, 대도시 주변지역에서 사북으로 왔어.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려면, 가족은 따라와야 했지. 사북 어린이들의 글을 소개할게.

우리집
우리집은 방이 너무 좁다. 그래서 나는 잠을 편하게 못 잔다. 그리고 내 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내 동생은 잠을 아주 이상하게 잔다. 내 배에다가 다리를 올려 놓거나 아니면 우리 엄마 가슴 위에서 엎드려 잔다. 그래서 나는 아빠보고 방이 넓은 데로 이사를 가자고 그러면, 아빠는 자꾸 1년만 더 살고 가자고 하신다. 엄마한테도 그러면 엄마는 또 아빠하고 다르다. 엄마는 3년만 더 살고 가자고 하신다. -2학년 정혜영

내 얼굴
삼학년 때 밥을 안 싸 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이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 -5학년 김상은

아버지
무용이 다 끝나고 집에 와 보니 아버지께서 세수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면 굴 속에 들어가셔서 우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탄을 캐내고 월급은 조금밖에 없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5학년 박영희

지금까지 조세희가 쓴 <침묵의 뿌리>였어. 이 책은 산문집이면서 사진집이기 때문에 사진을 함께 보면 더 좋아. 1980년대 사북, 서울, 부산 외에도 인도, 프랑스에서 저자가 찍은 사진이 있어. 나는 사북 어린이들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눈을 뗄 수 없었어. 사진에 나온 아이들과 내 부모님의 나이대가 비슷해서, 특별하게 느껴졌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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