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03

검토 완료

김진수(sanje0324)등록 2017.08.17 19:58

ⓒ 김진수


어머니의 집안은 자수성가한 건축업자였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대단히 부유했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명절에 음식하는 풍경은 일제말기의 당시의 어려웠던 시절에도 남다른 풍요로움을 구가하게 했던 외할아버지의 사업가로서의 능력의 소산이다. 어머니는 그저 그때 본 광경을 가감없이 지금 눈에 펼쳐지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시대, 우리의 전통을 지키다 01

우리 민족은 일제시대에 자기 주장을 펼 수 없었다. 우리의 것도 거의 모든 게 없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각 가정에서는 우리의 전통을 이어갔다. 조상님께는 한결같이 제사를 지냈고, 명절에는 차례를 치렀으며, 설날에는 새옷을 입고 친척집에 다니면서 세배도 드리고 세뱃돈도 받았다. 마당에서는 널도 뛰고 팽이도 쳤다. 오월단오날이나 추석에는 그네타기에 열을 올렸고 조상님 산소에 성묘도 다녔다.
제삿날에는 우선 작은 시루에 편을 앉힌다. 불린 쌀은 방앗간에서 찧어오고, 팥은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맷돌에 간 다음에 잘 쪄서 채에다 바쳐 곱게 가루를 내었다. 팥과 떡가루를 얄팍하게 차례로 시루에 안쳐서 쪄낸 그 시루떡을 편이라고 했다. 편이라는 말에는 돌아가신 분들이 편히 쉬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살코기는 크고 넓적하게 저며서 잔 칼질을 했다. 그리고 자근자근 앞뒤로 두들기고 슴슴하게 양념에 재어놓아 적고기를 준비했다.
간과 천엽, 민어 같은 흰살 생선(민어)을 저냐로 부치고 통도라지는 푹 삶아서 반으로 갈라 굵은 쪽을 칼등으로 두들겨 양념을 했다. 또 살코기를 10센티미터 정도로 작게, 5미리미터 두께로 가늘게 썰어서 양념하고 실파도 같은 길이로 썰고 산적꼬챙이에 도라지, 고기, 실파를 차례로 끼어서 밀가루와 계란을 풀어 잘 섞어놓은 물에 꼬치를 담았다가 지짐판에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넓적한 누름적을 부쳤다. 또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로는 나물을 무쳤다. 녹두는 맷돌에 갈아서 물에 불려 몇 번 행구어 껍질을 벗겨내고, 껍질이 벗겨진 녹두를 다시 한 번 맷돌에 곱게 갈아서 녹두전[빈대떡]을 부쳤다. 큼직하게 잘라놓은 다시마는 젖은 행주로 깨끗이 닦아 큰 팬에 올려놓고 오므라들지 않게 젓가락으로 눌러가며 앞뒤로 튀겨 튀각을 만들었다. 튀긴 튀각은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간 절인 조기는 석쇠에 타지 않게 구워내었다. 두부는 넓적하게 썰어 부쳤고, 밤은 삶아서 겉껍질과 속껍질이 부서지지 않게 예쁘게 까서 놓아두었다.
그리고 식혜도 만들었다. 엿기름을 큰 그릇에 물을 붓고 쏟아놓으면 껍질은 물위로 올라오고 하얀 엿기름 가루만 밑에 가라앉는다. 물위에 올라온 껍질은 모두 건져내고, 가루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맑은 물만 살살 뜬다. 된 밥을 따로 지어 잘생긴 오지항아리에 넣고 그 위에 식혜 물을 가득 부어서 따뜻한 아랫목에 넣고 이불을 씌웠다. 서 너 시간 뒤면 밥알이 삭아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더운 아랫목에 있던 것을 얼른 꺼내 놓으면 밑에 있던 밥알이 모두 떠오른다. 밥알은 모두 조리로 건져서 다른 그릇에 담고 찬물을 붓는다. 삭혀 놓은 물과 먼젓번에 엿기름 바친 맑은 물을 한데 섞어 설탕을 넣고 팔팔 끓이면 식혜가 된다.
수정과도 빠질 수 없었다. 생강과 통계피를 각각 물에 넣고 끓여서 한데 섞고 누런 설탕을 넣어서 다시 한번 끓인다. 생강물을 완전히 식힌 다음 곶감 꼭지를 따서 생강물이 들어 있는 항아리에 넣는다.
실백[잣]은 위쪽에 붙어 있는 꼭갈을 모두 따내고 식혜나 수정과를 담은 화채그릇에 띄웠다. 과일과 강정, 약과 등은 사다가 준비했다.
제사상에는 옛글자로 표구된 병풍을 쳤다. 제사상 위에는 흰 옥양목을 풀 먹여 빳빳하게 손질해 놓았던 제사상보를 깔고 발 달린 작은 길쭉한 상을 바로 밑에 놓는다. 향나무 깍은 향과 향로 술잔과 주전자를 준비하고 발이 고운 돗자리를 깔고 나면 그동안 마련한 음식이 진열된다. 지방 모실 독을 세우면 큰오빠가 화선지에 붓글씨로 지방문을 썼다. 쓴 지방문은 규격에 맞게 순서대로 잘 접어서 지방을 모셨다.
양옆에 촛대를 세우고 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아버지와 오빠들은 잘 차려 입은 복장으로 대청마루가 꽉 차게 서서 제사를 지낸다. 딸들은 구경만 하고 어머니는 시중만 하고 절도 하지 않는다.
아침부터 준비한 제사가 다 끝나면 가족들은 식사를 한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겸상을 했고, 오빠들과 딸들은 각각 다른 교자상에서 격조있게 음식을 먹었다. 제사 비빔밥이 맛있었는데 제사 준비하느라고 만든 적고기, 저냐, 나물과 튀각을 부수어 밥과 함께 비벼서 만들었는데 너무도 맛이 있었다. 그리고 제사상에 올렸던 국수장국도 맛있었다.
자정이 지나고 딱딱이가 딱딱 두들기며 밤길을 순시한다. 그러면 한밤중에 변소에 갈 때도 딱딱이 소리 덕분에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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