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일제시대, 소학교에 들어가다 01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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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sanje0324)등록 2017.08.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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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일제시대, 소학교에 들어가다 01

내가 살던 시간은 격동의 역사였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치하에서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은 당시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창씨개명을 실시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고 소학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집에서는 가족들과 우리말을 쓰면서 생활하는 것을 당연한 걸로 알고 그동한 살아왔지만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일본어 책으로만 공부하였다.
등교하면 맨 먼저 하는 것이 교문에 잠시 서는 것이었다. 교문에서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에는 신을 모셔 놓은 호안댕[ ]이 조그맣게 지어져 있었다. 나는 그곳을 향하여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정중히 절을 하고 난 다음에야 운동장을 통하여 교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학교 생활은 시작되었다.
지금과는 달리 국경일에는 수업이 하나도 없었고 기념식만 열렸다. 그날에는 굳게 닫혀 있던 호안댕 문이 열려 교장선생님이 그 안의 융단보자로 싼 상자를 꺼내들고 조심스럽게 전교생이 도열한 가운데를 지나서 강당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강당에서 기념식이 시작되면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본 국가를 불렀다. (기미가요와 .......무우스우마대)
교장선생님은 일본 국가 제창이 끝나면 보자기를 풀러 그 안의 상자 속 두루마리를 풀고 펼쳐가면서 두루마리에 써진 글귀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징 오모미 와가 고소고소로 시작해서 길고 긴 낭독이 끝날 때쯤에는 교메이 교지)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식순서에 따라 그 날의 뜻이 담긴 훈화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면 지루했던 식은 끝이 났다.
경축식 날이면 전교생이 흰 색과 붉은 색의 손바닥만한 찹쌀떡을 두 개씩 꼭 받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으로 향했다. 남산에 가면 300개 이상의 돌계단이 나왔다. 우리는 돌 계단을 하나 둘 세면서 올라갔다. 다 올라가면 숨을 죽이고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를 모셔놓은 웅장한 사원을 향하여 45도 각도로 절을 하고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선생님들의 몇 가지 지시에 따라 예를 표했다. 그 다음은 남산에서의 해산이었다.
우리는 손에 들고 있던 떡을 먹으며 집으로 곧장 돌아오기보다 남산 둘레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남산 주위를 구불구불 돌다보면 크고 작은 신궁들이 많이 나왔다. 신사가 있는 앞에는 아주 크고 높은 도리이이 [ ] 모형이 붉은 색을 띠고 서 있었다. 그게 신사가 있다는 표시였다. 남산길을 걷다보면 장충단공원까지 오게 되었다. 거기서 황금정[을지로] 쪽으로 내려와 서울운동장 건너편 청계천 양쪽 다리께까지 막히는 곳 없는 우리들 세상이었다. 긴 청계천 변을 걷다보면 수표교가 나오고 이윽고 광교, 무교, 광화문 소방서가 나오는데 드디어 전찻길이 보였다. 집에 가까이 온 것이다. 나는 한달음에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양력 1월 1일 일본 설날에는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가야 했다. 새해 새 아침에 남산에 신사참배를 꼭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그 날은 몹시 추웠다. 남산에 올라가면 여자들은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발이 몹시 시렸다. 맹추위 속에서 신사참배가 끝나면 남산동 쪽으로 곧바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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