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으로 부터 배우는 '악'의 탄생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검토 완료

김현진(tt00457)등록 2017.08.09 14:53
김영하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된 것은 '퀴즈쇼'라는 장편소설에서 부터 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고시원에 사는 스물 중후반의 백수 남자 주인공이였었는데, 책속에서 홍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곤 했었다. 그 당시 미대진학을 목표로 한답시고 홍대앞에서 실기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책 속에 등장하는 서울의 배경과 내가 직접 마주하는 서울의 배경의 느낌이 항상 오버랩되곤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서울은 나에게 어딘가 모르게 울적하면서도 차갑고 독립적인 분위기를 뿜어냈었다. 마땅한 직업이 없던 남자 주인공은 고시원과 밖을 오다니며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다가 우연히 시작하게된 인터넷 카페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그 후에 김영하의 다른 소설들을 읽긴 했지만 '퀴즈쇼'보다 내용이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진 못했던 것 같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의 표지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의 표지 ⓒ 문학동네


얼마전에 내 놓은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는 이번엔 치매걸린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데리고 세상에 나왔다. 70살 노인인 그는 예전에 연쇄살인을 저질렀지만, 그가 살인을 저질렀던 군사정권 시절이라는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그가 죽인 사람의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았고, 그가 연쇄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매스컴 쪽에서는 범행을 모두 북쪽의 빨갱이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래서 주인공은 운좋게(?)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70년동안 감옥 한번가지 않은 살인자로 살아온 셈이 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그의 딸 주변에 나타나게 되는 또 다른 '살인자'로 보이는 남자 때문에 25년동안 끊고 있었던 살인을 오직 '살인자'로 보이는 그를 죽이자는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게 되는데, 갑작스럽게(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라는 판정을 받게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메멘토'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단기기억 상실증에 걸린 영화속 주인공과 비슷하게 이 소설속 주인공도 알츠하이머에 걸렸고, 주인공이 억지로 기억을 하기 위해서 그 때마다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지로 적어 나가는 형식으로 글이 쓰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히 영화 '메멘토'에서 보다 조금 더 확장된 '파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었던 모든 생각(알츠하이머에 걸리기 이전의 기억들까지 모두)이 다 무너지면서 결국에는 자신마저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실체에 대해서 파괴되는 것을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합리적인 이성(자신이 그러하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이 파괴되는 한 순간을 보여준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 지니라"


이 책의 첫 장면에서 금강경을 읽고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온다. 응무소주이생기심, 즉 이 세계의 어떠한 허상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자유롭게 향하는 곳으로 가라는 뜻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연쇄살인범은 이 뜻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평소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젬병이였던 주인공은 그의 무능력을 오히려 능력으로 전도시키면서 주인공이 이해할 수 없고 관계 맺지 못하는 대상들을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해설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 속에서 바로 '악'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고 주인공을 제외한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모든 대상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고 부정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능력인 마냥 확인하며 즐거워 한다고 이야기한다. 작가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간과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과 느낌과 생각은 기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으켜세워진 허상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 허상들에 집착하며 고통을 받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무명)인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색)이 기실 텅 비어있음(공)을 깨닫는 것, 그 깨달음에 도달하는 실을 별다른 것으로 착각하여 수행의 방편에 또다시 집착하고 편견을 만들어내는 모든 일 또한 기실은 텅 비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 삶의 한복판이 이미 우주의 비의와 일치하고 있음(본래면목)을 깨닫는 것, 그것이 근심과 고통의 간섭없이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해탈)이다. 아마도 이것이 공을 강조하는, 앞에서 인용된 반야심경의 가르침 일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관념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이 우리를 고통에서 구제해 평온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책의 뒷부분에 있는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해설자의 관점에 대해서 모두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굳이 모든 관점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소설을 읽을 때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작가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게 소설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김영하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그는 "내가 쓴 소설이 세상에 나가게 되면 그 소설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것이다."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이 아니라 그것이 그림이 되었건 다른 형식의 창조물이 되었건 간에 어떻게든 원작자를 가지고 있는 창조물은 사람에 의해 다시 재해석 되고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제 개인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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