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수상] 녹음방초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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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hslee)등록 2017.06.01 14:46
[계절의 수상] 녹음방초의 시절

앙상한 나무에서 잎들이 자라
그늘을 만들어서 쉼터가 되고
메마른 대지 위에 풀들이 자라
초원을 만들어서 향기를 주네

녹음방초의 풍경. 잎에 덮힌 나무로 녹음이 우거지고 풀에 덮힌 땅에서 풀향기가 풍기는 녹음방초 시절의 모습. ⓒ 이효성


   이제 절기력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달력상으로도 명실 공히 여름이 되었다. 그 동안 따뜻한 봄날에 온갖 초목들이 나서 흐드러지게 자랐다. 이른바 만화방창(萬化方暢)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화방창의 대표적인 예가 잎이라 할 수 있다. 메마르던 땅에서는 풀잎이 나고 이파리 하나 없던 나무 가지에서는 잎들이 돋아 세상이 조금씩 잎들로 덮여가더니 이제는 아예 세상이 온통 잎의 천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무는 녹음이 우거지고 풀은 향기를 풍긴다. 그래서 여름철의 자연 경관을 가리켜서 흔히 녹음방초(綠陰芳草)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본래 푸르게 우거진 나뭇잎 그늘(綠陰)과 향기로운 풀(芳草)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이 여름철의 경관을 가리키게 된 것은 그만큼 여름의 경관에서 녹음방초가 지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의 경관이 아니라 여름 특히 첫여름을 일컬을 때에는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 말은 녹음방초가 꽃보다 나은 때라는 뜻이다. 잎도 없는 나무들에서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 세상을 울긋불긋 물들였던 봄도 이내 가버리고 꽃이 지면서 잎이 무성해지고 녹음방초의 여름이 된다. 여름에도 분꽃,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 꽃창포, 매발톱꾳, 패랭이꽃, 나팔꽃, 메꽃, 해바라기, 꽃창포, 접시꽃, 과꽃, 초롱꽃, 장미, 찔레, 해당화, 양귀비, 원추리, 참나리, 도라지, 달맞이꽃 등의 풀꽃들과 수국, 백리향, 자귀나무, 배롱나무, 무궁화, 능소화 등의 나무꽃들이 나름대로 화려하게 피지만 대체로 이들 꽃들은 이미 무성해질 대로 무성해진 잎들에 가려져 멀리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름은 녹음방초가 꽃보다 나은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을 인생에 비유한 단가로서 영화 <서편제>에 삽입되어 많이 알려진 <사철가>에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라"라는 구절이 있다.
   나뭇잎이나 풀잎이나 4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나고 자라기 시작하여 4월 말까지 풀잎은 땅을 덮고 나뭇잎은 나무를 가리기 시작하여 대체로 4월 하순부터는 싱그러운 신록의 세상이 펼쳐진다. 이 연초록의 신록이 대체로 5월 하순까지는 유지된다. 그러나 그 한 달 사이에 잎들은 더욱 자라고 5월의 강렬한 햇빛의 세례를 받아 연초록이던 잎들이 어느 덧 진초록으로 변하여 나무를 완전히 덮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풀잎이나 나뭇잎이나 클 대로 크고 짙어질 대로 짙어져 녹음방초의 시절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풍경을 화가이자 자연시인이었던 성당(盛唐)의 왕유(王維)는 "푸른 나무의 짙은 녹음이 사방을 덮는다(綠樹重陰蓋四隣)"고 묘사했다. 그래서 이때 꽃들이 아무리 화려하게 피어도 잎도 없는 나무들에 온통 꽃뿐인 한봄처럼 꽃이 두드러져 보이지는 못하고 무성해질 대로 무성해진 잎들에 가리거나 치이게 된다.
   잎들로 무성해진 나무는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는 그늘을 제공한다. 만일 나무가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한여름의 뙤약볕에 많은 동물들이 안전하게 쉴 곳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자외선이 차단된 시원한 곳이 필요한 사람들은 피부에 막대한 피해를 입거나 아니면 자외선을 막기 위해 온 몸을 옷이나 천으로 감싸야 하기에 훨씬 더 뜨겁고 무더운 여름을 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느티나무, 느릅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오동나무, 버드나무, 떡갈나무, 은행나무 등의 큰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또는 여러 나무들이 어울려 만든 숲에서 한여름의 뙤약볕과 무더위를 피하며 쉬고 한담도 나눌 수 있게 된다. 공자는 벌레가 타지 않는 은행나무 그늘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은행나무는 아카데미의 상징이 되었고, 명륜당과 성균관에 500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다면 풀은 향기를 제공한다. 여름에는 어느 곳이나 풀이 무성하고 대부분의 풀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타감물질(他感物質, allelochemicals)을 분비하기 때문에 풀밭에 가면 풀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쑥, 박하, 배초향, 들깨풀 등과 같이 향기가 강한 풀들도 적지 않다. 또 풀을 베면 그 상처에서 더 진한 향기가 난다. 풀을 베어낸 곳이나 건초 더미에서 강한 향기가 나는 이유다. 영국 시인 브리지즈(Robert Bridges)의 시 <6월이 오면>은 "6월이 오면, 그때 온종일 / 향긋한 건초 속에 내 사랑과 함께 앉아 / 산들바람 부는 하늘에 흰 구름이 지어놓은 / 눈부신 높은 궁전들을 바라보리라"라고 읊고 있다. 이제 세상은 바야흐로, 꽃보다 더 나은, 푸른 나뭇잎들의 그늘 속에서 그윽한 풀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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