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 양파를 먹지 않는다. 샌드위치나 샐러드에서 생 양파 향이 나면 바로 내려놓는다. 어쩌다 모르고 입에 들어갔을 땐 얼른 뱉어낸다. 뱉을 상황마저 안 되면 코를 막고 꿀꺽 삼킨다. 코를 막으면 양파 향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햄버거에 있는 양파를 손가락으로 빼내는 것이 어쩐지 좀 부끄러워졌다. 어릴 때 먹지 않던 생 마늘이나 생 파는 이제 잘 먹는데 왜 유독 양파만 못 먹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문득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아! 혹시......?
▲ 유독 생 양파만 못 먹는 이유는 뭘까. ⓒ 심혜진
중학교 때였다. 엄마가 짜장면을 시켜줬다. 한창 신나게 먹고 있는데 옆에서 아삭아삭 하는 소리가 났다. 이것저것 가리는 것 많은 언니가 글쎄 생 양파를 입에 물고 있었다.
"양파를 먹어?" "응, 왜?"
"맛있어?" "응"
"에이... 거짓말!" "진짜야, 달다니까. 한 번 먹어 봐."
양파 씹는 소리가 무척 경쾌하게 들렸다. 향긋한 사과를 먹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그래, 달다고 하니 한 번 먹어보자.' 언니를 따라 양파 조각에 춘장을 조금 찍어 입에 넣었다. 이런, 맙소사! 달기는커녕 매운 양파 향이 입안을 '쩡'하니 가득 채웠다. 구토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았다.
"달긴 뭐가 달아? 맵기만 하구만!"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말고!" 매운 양파 때문인지 속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물이 쭉 나왔다. 입 안에서 양파 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날 이후 단 한 조각의 생 양파도 입에 넣지 않았다.
'트라우마'(trauma)가 이런 걸까? 트라우마는 심리학에서 '정신적 외상'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뜻하는 용어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이 이후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불편함을 안긴다. 당시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트라우마는 다양한 심리ㆍ신체 증상으로 나타난다. 불안ㆍ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발이 떨리고 숨이 안 쉬어지고 온몸이 땀으로 젖기도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언니에게 골탕 먹었다는 억울함, 바보같이 속았다는 자책, 별 거 아니란 듯 가볍게 넘긴 언니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이 양파의 매운 맛과 뒤엉켜 내게 상처를 남겼나 보다. 이후 절대로 어리석게 굴지 않겠다는 강한 저항감이 입 안에서 생 양파를 밀어냈다. 내 부족함을 탓하는 대신 양파를 혐오하기로 한 것이다. 어린 나에겐 그 편이 훨씬 편했을 테니까.
개인처럼 집단도 트라우마를 겪는다. 우리 국민 다수에겐 광주가 그랬고 세월호가 그랬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언론의 뭇매를 맞으며 포토라인 앞에 섰을 때, 나는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데'라고 생각만 할 뿐, 안타깝게도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잡초처럼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를 좋아했지만 한편 실망한 부분도 컸기에 선뜻 그를 두둔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막상 그를 잃고 나니 실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시시때때로 올라와 어디서든 눈물을 흘렸다. 힘내시라는, 믿는다는 댓글 하나라도 남길 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 몫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친구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노무현의 부활이다. 그들은(우리는) 또다시 '노무현'을 잃을까 두렵다. 두려움은 불안을 낳는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불안은 공격성과 혐오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대통령과 그 정부에 대한 정당한 비판에도 공격과 혐오가 들불처럼 일렁인다. 내 불안을 맘대로 투사하며 이곳저곳에다 돌을 던진다.
치유의 핵심은 직면이다. 노무현을 잃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그 실체를 바로 봐야 한다. 국민과 언론의 건강한 비판과 견제 때문에 노무현이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의 이런 모습을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권력에 물든 검찰과 왜곡된 언론, 비뚤어진 욕심만 가득한 정치세력이었다. 이런 것들이 또 다시 우리가 선택한 지도자를 뒤흔드는지 유심히 살피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 우리가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트라우마의 실체를 어렴풋이 파악했으니 이제 생 양파를 직접 먹어보는 일만 남았다. 두렵고 떨린다. 더 이상 밀쳐놓지는 않겠다. 내 몫의 도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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