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이 추억하는 '나의 10대'

그리고 내가 그리는 나의 20대

검토 완료

김홍균(hongkyun98)등록 2017.04.23 14:27
20살이 되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한가지 꼽으라면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각이 달라졌다. 대학생이 된 나에게는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자유와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유가 찾아옴으로서 생긴 나의 삶에 대한 고민. 지금 이 밤에 20대를 고민하고 있는 청춘들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살것인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을 하고 살것인가'이다. 희망과 열정을 심어주겠다는 여러 강의를 찾아보고 멘토라는 사람들에게 여러 조언도 들어보지만 정작 '나'는 없다.
나는 10살때 축구선수의 꿈을 꾸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축구를 잘 못한다. 중학교 때 잠깐 농구학교 대표를 했었지만 그 마저도 식스맨(농구는 5명이서 하는 경기인데, 여기서 식스맨은 벤치에서 대기하다가 조커로 사용되는 선수를 말한다)으로 활동하거나 벤치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의 운동신경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래서 축구선수의 꿈을 하늘로 슝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 중학교에 와서 내가 가진 목표는 교사.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고 중, 고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교과서만 읽고 끝나버리는 중학교의 교수방식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어린나이에나는 도덕적, 윤리적 답변만 달면 100점이라는 수치를 볼 수 있는 구닥다리의 교육말고, 우리가 비록 어리지만 '무엇을 하고 살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수업을 하고싶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내가 원해서 S외고에 진학했다. 다행히 중학교때 영어성적은 합격안정선에 위치했고 이제 자소서만 쓰면 되는 순간, 나는 또 우울해졌다. 고등입시를 치열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 많은 사교육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질문들, '인성'과 '독서','자기주도성'등등. '독서'분야에서 내 생각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독서 수준을 높이는 것도 책제목에 비례하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결국 꿈을 연관지어 써야하는데 꿈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교사가 되고싶었지만 혹자는 외고까지나와서 선생이 되려하느냐 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나는 교사를 존경해왔는데 내 꿈이 그렇게 무시당해버린것이다. 어쩌면 그 말은 모든 교사의 꿈을 가진 사람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선생님의 꿈을 가지고 외고에 입학했고 이곳은 적어도 다를 줄 알았다.

똑같은 방식의 공부, 대입이 우선인가
나는 암기형 공부를 좋아하지 않지만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1달동안 200개 가량되는 지문을 외우려고 밤을 지새운적도 있다. 하지만 내 내신은 4점대. 형편없었다. 주변사람들은 위로한다. 외고에서 4점대면 잘하는 거라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외고는 이제 일반고와 다른 메리트가 없다. 언어를 한가지 더 배우는것. 그렇지만 이 또한 수능과 입시에 구속당한 교육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내 전공어는 영어, 부전공어는 독일어였다. 나는 그래도 영어와 독일어는 끝까지 가지고 나와 현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국엔 대입이었다.
다행히 내가 외고에서 얻은 것은 독일어와 영어뿐만이 아니었다. 좋은 친구도 얻었고 좋은 선생님들도 분명 계셨다. 아직까지도 나의 인생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해주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 주말에 가끔 탁구도 치면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나의 배움과 깨달음은 바로 '삶을 기획하는 방법' 이었다.

내가 만드는 프로젝트 ' 따뜻한 삶을 기획하다'
학생부 종합 전형은 나에게 있어 큰 기회였다. 수능성적도 좋지않고 내신도 좋지 않았던 나에게 대입에서 뒤집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제도를 감사히 여기는 이유가 내가 현재 대학에 잘다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학생부종합전형을 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내 생기부를 디자인 해나가면서 사비로 돈을 쓴 기억이 없다. 모든 활동은 내 역량 안이고 안되는일은 현실에 부딪히면서 도전해보았다. 그속에서 나는 '도전정신'과 '기획정신' 두가지를 얻었다. 일단 무엇이든 부딪혀보았다. 첫번째 나의 프로젝트는 '작은통일 프로젝트' 였다. '작은통일 프로젝트'는 북한이탈청소년들과 함께 진행한 연탄봉사 및 남북포럼 프로젝트 였는데, 국가차원의 큰 통일 이전에 먼저 우리가 북한이탈인들을 이해하고 그들도 우리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프로젝트이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이 생각을 했다. 생각하자마자 제일 믿을 수 있는 친구한명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이 프로젝트가 죽이되든 밥이되든 끝까지 함께하자고. 이제 동지 한명이 생겼으니 담당선생님을 구하러 갔고 조언을 얻었다. 이제 북한이탈 청소년들이 있는 탈북대안학교를 설득해야 했다. 나는 성남시까지 찾아가 PT를 했다. 우리가 왜 이 프로젝트를 하려하는지, 그리고 왜 해야하는지. 통일에 대한 당위성보다도 그 과정에 있어서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고 나는 학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탄 구매를 위한 교내 모금을 진행했다. 두번이나 모금함이 철거당했지만 계속 싸웠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모였고 여기서 뜻이 맞는 친구들이 더 참가해주었다. 우리의 좋은 뜻을 알고 외부에서 후원도 들어왔다. 그래서 봉사 몇일전 마침내 나는 '우리'가 되었고 연탄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따뜻한 삶을 기획하는 것. 비로소 조금이나마 시작될 수 있을 것같았다. 나는 그 이후에도 3년동안 다양한 친구들과 프로젝트팀을 꾸려 교내에 정치인식개선캠페인을 진행하기도하고 '한국문화 제대로 알기 프로젝트' 등을 진행했다. 다양한 깨달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금의 나로서 성장했다.

이제는 '꿈을 기획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대학에 진학했다.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내가 가고싶어했던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서 행복했다. 여전히 대한민국에는 학벌주의가 존재하고 내가 살아 있을 동안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국대는 SKY에 밀려 10위권 대학이라는 '프레임'속에 가둬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프레임'을 깨는 일을 하겠다. 내 학벌이 무시당할 지 몰라도 나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가치를 생산해 내는 일'에는 귀천이 없고 학벌도 필요없다. 아이디어 싸움이기 때문이다. 새내기 생활 1달째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진다.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직업도 있지만, 조금은 추상적인 '기획'에 관한 '꿈 dream'이다. 나는 어떠한 가치를 생산해내는 기획가가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라면 '글의 가치'를 생산하는 일일 것이고 정치인이라면 '주권자의 가치' '국가운영의 가치'등을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 두 직업을 가지고 싶기도 하지만 이 두 꿈을 모두 이루고 싶다.
요즈음 기획중인 한 프로젝트가 있다. 학내에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을 위한 쉼터를 개발하는 일이다. 학생차원에서 진행하기 위해 친구들을 모아 구상하고 있다. 사회과학대 엘레베이터 옆 의자두개를 두고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빠른 시일내에 노동자분들의 쉴 권리를 찾아드릴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남들과 다를 것 없이 부족할 것 없이 살았다. 그래도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다른사람이 그러하다면 나쁘다고 비판할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변화 시키는 일을 하고싶다. 내가 기획한 상품 혹은 가치가 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면 나는 무슨일을 하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언젠가는 이러한 마음이 사회를 울리지 않을까.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