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필(弔筆) - 오늘의 한국 저널리즘을 애도함

기자들이여!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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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suljuk)등록 2017.01.05 17:04

제정 로마의 신문인 악타 디우르나


고대 로마 제정시대에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는 것이 있었다.

BC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된 후 파피루스에 기록한 악타 디우르나를 시장과 신전의 문 그리고 모든 공공장소에 게시하기 시작했으며 때로 나무판이나 돌비에 새기기도 했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지침/행정 사항을 알리고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선언문, 포고문, 원로원의 정치적 결정 사항 등은 별도로 제작되는 악타 세나투스-Acta Senatus를 통해 보도되었다.)

1620년 12월 2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코란토(Coranto)라는 상업신문이 이탈리아와 독일 등의 사정을 포함한 내용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했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1621년, 이 신문 수입을 금지하려했으나 당대의 뉴스수요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너무 커서 실패했다. 20년이 흐른 후, 1641년 12월 영국 의회가 찰스1세에게 통제를 풀어야 한다는 건의서(Grand Remonstrance)를 제출하면서 관제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본격적인 신문의 시대를 앞당겼다. 이것은 1641년부터 1651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잉글랜드 내전의 한 일면이었다.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 1세는 그로부터 8년 후 참수되었다. 이런 언로의 대중화 흐름 속에서 1702년 영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데일리 쿠란트(The Daily Courant)가 발행되었고, 미국에서는 1704년에 보스턴 뉴스 레터가 발행되었다.

이렇게 광범위한 정보의 수요가 급증하고 자유로이 유통되면서 정부와 관료들의 민낯이 낱낱이 보도되고 민심이 동요하자 영국정부는 또다시 정보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765년,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신문, 팸플릿, 광고지 등에 50실링의 인지(印紙)를 붙이게 하는 '인지조례'를 제정하고 실시했다.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다. 정부의 '인지조례'에 반발한 이들이 항의하며 저마다 다양한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부의 검열 및 규제 그리고 세금을 통한 통제에 저항하며 형성된 저널리즘은 보도의 자유를 중시하게 되었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와서는 저널리즘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영국의 왕립 언론 위원회(1949) 보도와 미국의 언론의 자유에 관한 비공식적인 위원회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 A Free and Responsible Press〉(1947) 같은 보도들은 현재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게 만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 와서 저널리스트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서의 '고발'은 저널리스트의 공적 책임을 수반하고 보여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즉자적 사건보도에서 탈피하여 관점있는 보도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고(그런 보도가 공정한 지 아닌 지에 대한 논의가 별도로 수행되어야 하지만), 취재의 자유에 있어서 취재원을 보호하는 윤리와 더불어 취재된 것에 대한 기자의 자율과 책임 역시 중시되고 있다.

청와대 신년간담회. ⓒ 청와대


2017년 1월 1일, 정부는 청와대 출입기자단에게 꼼수를 부렸다. 한광옥 비서실장은 기자들을 초청하여 떡국을 함께 먹던 중, 15분 후에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있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기자들은 이 혼란한 정국에 대통령의 입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대(聲帶)가 거세된 강아지가 제 주인 뒤를 따르듯 우르르 몰려간 꼴을 본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청와대는 기자들에게 카메라와 노트북 소지, 그리고 녹음을 금지했다. 이것은 기자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과 다름없다. 청와대는 청와대 측에서 촬영 및 녹음을 하여 언론사에 제공 하겠다고 했다 한다. 소위 엘리트들, 기자들의 꽃이라 할 수도 있는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이런 전대미문의 요구를 수용했다(물론 이에 반발하여 간담회를 거부한 멋진 기자들도 있다!).

청와대의 이런 행태는 이 글 초두에 언급한 고대 로마 제정시대의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의 부활에 버금간다. 이 정부는 관제언론을 통한 여론 호도와 언론 및 언론인에 대한 통제를 일삼던 자들의 후예로서 그 정체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정권수호를 위한 언론 통제와 조정 욕구! 나는 그 날의 간담회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언론 선배들의 저항을 무색하게 만든 2017년 벽두의 무력하고, 길들여진, 주장도 저항도 모르는 주체성 없이 길들여진 기자들의 군상을 보았다. 애초에 그들에게서 관점 있는 기사, 강단 있는 기자정신을 바란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2017년 1월 1일은 한국 저널리즘의 굴절의 날이요, 한국 저널리스트들의 굴종의 날이었다. 한국 저널리즘의 죽음을 애도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의 권두언은 김교신의 '조와'(弔蛙)를 게재했다. 일제강점기 민족과 민중에 대한 일제의 폭압을 고발하고 시련당하는 민중을 묘사함으로서 불온잡지로 지목되었고 폐간 당했으며, 김교신은 소위 "성서조선사건"으로 옥고를 치뤘다.

다음은 그 내용의 후반부이다.
"...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흑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패러디 하겠다.
... 새해 첫날 햇살이 북악을 넘어가던 오후, 이승만 이후 오늘까지 굳어왔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필군(筆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필군(筆君)들의 시체들 어지러이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나온 정권의 비상한 흑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필군(筆君)들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엇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민중의 혹한은 천만을 계수하며 새 날을 보는데, 춘추관의 기자들 찻잔엔 조각달조차 떠 있지 않은가보다. 따뜻한 라디에이터 기운에 취해 졸던 기자군들은 해제된 무장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서서 하명을 기다렸고, 기자랍시고 긁어댄 글발에는 덕지덕지 그들이 버린 직필(直筆)과 강단(剛斷)의 찌꺼기만 간신히 붙었다. "짐작컨대 정권의 비상한 흑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오호라. 살아있는 듯 보이나 실은 죽어 있는 이 땅 저널리스트의 초라함이여! 떡국에 배부르고 차 한장 과일 한 조각에 굼떴던 당신들이여! 동아조선투위, 관제 언론의 동토를 깨뜨렸던 당신들 선배들이 기꺼이 배고픔과 혹한의 길을 선택했음을 기억하라. 기대하노니, 담저(潭低)에 기어다니는 번뜩이는 글쟁이가 아직 한둘은 살아있기를! 혹 있는 전멸은 면한 한 둘 기자들이여! 2017년 1월 1일의 실종된 기자정신을 당신의 백지에 새기라. 굴종을 타파하라.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거부하라! 2017.1.4.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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