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강남역 사건은 예견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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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closer82)등록 2016.07.11 13:35
# 이것은 해프닝인가 아니면 패턴인가.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모임이 전주에도 열렸다. 성폭행 피해자를 욕하는 경찰 아버지, 길 걷는 젊은 여자에게 욕설을 한 트럭 운전사, 남자란 가해자로서의 고백과 사과 등 촛불 하나에 이야기 하나가 맞닿았다.
2차는 맥줏집. 한 테이블에 여자 4명과 남자 1명이 앉았다. 상대 말이 끝나고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도 아까운 듯 터져 나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남1, 여1은 동시에 말을 시작했고 서로 먼저 하라고 양보했다. 여1이 바로 말을 시작했다. 그곳의 4명은 그 상황이 자연스러웠다. 그들 모두 듣기보다 말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 그게 누구였든 상대가 양보하면 말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은 당황했다. 옆에 있던 내가 느낄만큼.

익숙한 무언가가 부서지면 누구나 당황한다. 남녀가 말하려 할 때 보통 먼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다. 성별문화를 뛰어넘은 자들이 모인 곳에서 4명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단 한 명에게만은 '당혹'으로 남았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저자 레베카 솔닛은 정확히 그 지점을 짚는다. 나쁜 의도가 있거나 인격적 결함으로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자르거나 자신이 먼저 말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여기엔 '문화'가 있다고 말이다.

# 여자는 모두 똑같이 겪는다
그녀는 말한다. 여자가 남자를 힐책하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 자체를 의심한다고. <그동안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며, 선천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현을 동시에> 이 '낡은 설정'은 여태 일상적으로 이 문화에 문제제기 하는 여성들에게 씌워져왔다. 1991년 애니타 힐이 치근대는 상사를 성희롱으로 고발하자 많은 이들이 그녀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한 저널리스트는 10년 뒤에야 그녀를 공격한 것을 뉘우치며 성희롱범이 힐을 모함하는, 종종 서로 모순되는, 온갖 주장을 몽땅 섞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말대로면 그녀는 '약간 미쳤고 약간 헤픈' 여자가 된다. 힐의 싸움은 1991년 직장 내 성희롱법을 통과시켰고 다음 해 상하원에 여성이 대거 당선되는 '여성의 해'를 이끌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란 명칭이 생긴 것도 이때다.

이 과정을 <트라우마>의 저자 허먼은 이렇게 말한다.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 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는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 ... 모든 잔혹행위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여기에 조금 보태면 범인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하기위해 위의 '낡은 설정'을 이용한다. 가수 박유천을 고소한 여성들을 향해 '꽃뱀'이라 칭하는 게 이 논리다. 이 문화와 싸우는 모든 여성은 이 '낡은 설정'의 공격을 받는다. 그녀는 이 패턴을 이해해 더 이상 의미없는 것에 힘을 빼지 말자고 한다.

# 인정 안 한다. 고로 반복하겠다
2014년 미국에서도 '여성혐오VS 정신병'이 불붙었다. 5월 23일 22살 엘리엇 로저는 자기 아파트에서 남자 대학생 3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같은 학교 여학생 클럽으로 가서 총으로 여학생을 비록한 3명을 더 죽였다. 이후 행인을 무차별 살해하고 자살했다. 여학생만 골라 죽인 게 아닌데도 이 사건은 여성혐오란 주장에 심이 실렸다. 로저가 굳이 여학생 클럽을 타깃으로 살해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여성혐오와 따로 떨어져 있다기보다 '병든 뇌는 환경에 집착적,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다'란 전문가들의 평도 이어졌다. 사회에 여성혐오가 '문화'로 뿌리내려 있고 로저의 병든 뇌 역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강남역 사건 역시 우리 사회의 병폐를 보여준다. "나를 무시하는 여자들" 때문에 남성과 여성 중 여성을 골라 죽였다는 그와 여자들의 성적 거절이 모욕적이었던 로저 역시 같은 범주다. 여성혐오와 정신병 모두 지녔다 보는 게 옳다.
정신병은 사회가 함께 치료해야 하는 것이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모두 뇌에 병 이생기는 건 아니다. 개인의 특질이 좀 더 많이 반영된다. 그걸 사회가 일률적으로 바꾸긴 무리다. 그러나 여성혐오 문화는 우리가 바꿀 수 있다. 바꾸면 우리 모두 벗어난다.
강남역 사건에서 '여성혐오'를 빼면 '특별한 사건'이 된다. 그리고 반복될 것이다. 개인특질이 반영된 정신병이기에 해결 불가능한 일이 된다. 여기서 '여성 혐오'를 읽고 똑같은 패턴의 범죄를 막아야 한다.

# 모든 건 이어져 있다
미끄럼틀을 탈 때 무게를 실은 쪽으로 쭈욱 미끄러져 내려간다. 도중에 멈추기 어렵다. 몸에 힘을 꽉 주고 처음 내려온 곳으로 올라가려면 내려가는 것보다 힘이 몇 배나 든다. 그래서 대부분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다. 이것이 미끄러진 비탈길 이론이다. 처음 발을 들이면 자기도 모르게 그 길로 쭉 가게 된다는 뜻이다. 여성혐오도 그렇다. 리베카 솔닛이 파티에서 만난 남자가 자기 책 서평정도만 읽고서 그 주제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한 사건이 있었다. 그가 떠드는 동안 솔닛의 친구는 그 책 저자가 솔닛이라고 수없이 말한다. 그는 듣지 않는다. 아니, 들어도 듣지 못한다. 무례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때로는 '여성 무시' '여성 혐오' 문화에 두 눈과 귀가 가려져 눈앞의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그녀가 이를 '패턴'으로 보는 이유다. 이 작은 시각이 성희롱을 고발하고 부부강간을 제기하는 여자들의 말을 무시하게 한다. 그녀들의 신뢰를 깎아내리려는 범인들의 논리에 힘을 싣는다. 심한 경우 상해, 살해로 이어진다. 포르노를 보거나 여성을 사귄 경험이 있다고 여성혐오가 없다는 논리가 말 안 되는 까닭이다.

여성혐오 문화를 바꾸는 길에도 미끄러운 비탈길 이론이 성립한다. 여성혐오 패턴, 구조를 파악하는 게 첫 번째, 그 담엔 이를 설명할 언어를 갖는 것이다. 사안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도 정리되는 단어 '맨스플래인'이 탄생했다.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린 두 눈과 귀를 찾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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