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가 노래하는 '우리'를 부르다

검토 완료

김시정(yoyoeli)등록 2016.07.05 11:05
'나의 늙은 친구들'의 여행을 시작으로 8주간 우리를 그들 삶의 한 부분으로 초대해주었던 <디어 마이 프렌즈>가 막을 내렸다. 막이 내림을 알고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들의 뒷모습을 커튼콜처럼 바라보다 눈을 돌리니 엄마가 눈에 들어온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그렇게 그들의 삶을 엿보던 수동적 타자였던 나를 나의 삶으로, 내 인생의 '마이 프렌즈'를 바라보는 주체로 전환시켜 놓았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나에게는 누군가가가 필요해'라고.

육칠십대 노인들 이야기는 자칫 꼰대들의 '그때는 그랬던' 푸념이 되어버리기 십상인, '나의 꿈', '나의 행복', '나의 자아실현'이 강조되는 2016년 한국에서 <디어 마이 프렌즈>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몸으로 겪어내는 노인들의 좌충우돌과 함께 개인주의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배워야 하는 '우리'를 노래하였다.

젊은 시절 아이를 여읜 슬픔을 가족을 향한 헌신과 종교로 승화시켜온 희자, 희생적인 엄마, 아내로 살며 늘상 '내년'이 되어버리는, 남편이 약속한 '세계 여행'만을 꿈꾸며 살아온 정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한평생 일만 해오다 서투른 표현이 굳어 윽박쟁이가 된 석균, 사회적 성공에 넉넉한 형편을 이루어지만 나눌 가족이 없는 성재, 아파 누워있는 형제들과 조카들을 돌보며 연애 한번 하지 못한 싱글 할매 충남, 여배우로 화려한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지만 혹독한 암투병을 겪으며 사랑은 불륜으로 끝나버린 중견 배우 영훈, 바람 핀 남편을 여의고 노부모와 장애인이 된 동생의 뒷바자리를 하며 홀홀단신 딸을 키운 난희, 그리고 그들 모두의 딸 박완이 노래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고충을 삶이라는 노래에 묻고 묵묵히 살아왔다. 각자의 고충은 생존의 위기를 넘나드는 급박한 것이었기에 묻지 않고는 살아내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생존의 고비를 넘어서 한숨을 돌리고 선 그들의 옆에 죽음이 앉아있다.

동네 친구라는 그들의 테두리는 어린 시절을 공유한 관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각자의 아픔을 지켜봐주고 알아주는 동지애 같은 것이다. 단순히 알아봐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서로의 아픔에 상대를 구겨넣어 자신의 고통을 투사하는 존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투사의 베일이 벗겨지고 상대가 상대가 되는 날, 내가 내가 되는 날, 그들은 진정한 서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남편의 바람 상대인 여자와 친구 연을 유지했다고 평생 원망의 대상으로 영훈을 바라본 난희가 그랬고, 자신의 아기가 죽은 가장 두려웠던 그 순간, 함께 해 주지 못한 정아를 향한 원망을 묻고 산 희자가 그랬으며,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혼자 두고 갈 수 없는 딸인 자신을 먼저 약 먹인 날을 기억하며 엄마의 원대로 살아온 완이가 그렇다. 이야기 속에서 두드러지게 다뤄지지 않지만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서로 그렇게 얼키설키 얽혀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가 병이 나면 그 공명이 얼키설키 얽힌 줄을 타고 서로에게 전달이 되고 그래서 그들 중 하나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그리고 함께 그렇게도 치열하게 그 아픔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개인주의, 각자 독립적인 개체로 살며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두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 뿐 아니라 그만큼의 도움도 주고받기를 꺼리는 요즘의 젊은 이들 사이에 얼키고 설킨 줄 따위는 없다. 우리는 '우리'라는 말이 퇴색될 만큼 각자의 '나'를 살고 있을 뿐이고, 그렇기에 가장 안전한 '나'라는 테두리 안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아픔을 나눌 곳이 없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은 심리학적으로도 거짓이 아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이 주장하는 상담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 치유 관계는 '모자일체성'이라는 엄마와 아이 같은 일체성을 가진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 안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의 형용사가 되고, 힐링이라는 주제의 인문학이 그 어느 때보다 인기를 끄는 요즘, 혼자 듣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과정이 과연 진정한 아픔을 견디고 그로 인해 한 뼘 성장하는 치유의 과정으로 이어질지는 비관적이다. 치유는 아픔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인지하고, 이를 견디어내고, 아픔을 통해 자신에게 한 뼘 더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이 성장은 나만의 성장이 아닌 너와 나, 우리의 성장이며 결국 공동체가 함께 나아가는 길이 된다.

응답 씨리즈부터 [디어 마이 프렌즈]와 같은 전 세대의 이야기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우리의 현실, 나의 엄마, 아빠로서는 불편하면서도 강한 향수와 함께 우리를 티비 스크린 앞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의 깊은 내면 안에 각자이면서도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대한민국은 '우리나라'라고 부르고 엄마를 '우리 엄마'라고 부르며 '우리' 안에 사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 개인의 자아 실현은 중요하다.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강조는 '우리'라는 희생을 낳았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포기하기 보다는 '우리' 안에서 '각자'를 살 수 있는 대안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소통해야 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주인공들 각자의 스토리, 삶 안에서 각자의 아픔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 아픔은 진솔한 소통을 통해서만 인지되고 견디어질 수 있음을, 그래서 결국 진정한 나와 진정한 너, 진정한 우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노래라고 하겠다.

노희경 작가는 늘 각자 안에서 우리를, 우리 안에서 각자를 찾아내는 탁월한 감각을 가진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라는 그녀의 이번 작품을 노래라고 부르고픈 이유는 이 이야기가 함께 노동을 견디어 내기 위해 구성진 가락을 뽑아낸 선조들의 민요 같아서이고, 그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우리 안에, 우리의 삶에 계속 불려지기를 바라서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척박한 논두렁에 힘차게 울려퍼지는 '우리'를 듣고, 배우고, 함께 목청껏 부르며 개인 간의 분리가 낳은 갈등과 두려움 속에 사는 젊은이들이 '우리' 안에서 '각자'가 되는 행복을 찾아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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