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장터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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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순(us2248)등록 2016.06.23 10:33
  괴산 장날, 장터 입구에서 서명운동을 했다. 뜨거운 초여름 날씨에 '과거사법 개정'이라는 케지프레이즈를 걸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하기에 분주했다. 곱게 양복을 차려입은 어르신이 다가 와 "위원장님이세요?"라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잠시 이야기 좀 하자고 한다. 장터 입구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내용은 이승원씨의 구구절절한 가족사다.

명예회복 15%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는 하루아침에 초상집으로 변했다. 한국전쟁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죽은 사람이 약 70명이나 된다.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 다음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이고,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죽은 우익인사도 있었다. 국군 수복 후에는 부역자라는 혐의로 마을사람들이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 시절, 정부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해, 명예회복 된 이는 11명이다. 15% 정도만이 명예회복된 것이다.

이승원(78세. 충북 제천시)의 아버지 이석범은 1950년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녀봉에서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날 옥녀봉에서 죽은 이가 약 800명인데, 이 죽음의 대열에 이석범의 3형제가 함께 했다. 집에 출초상이 난 것이다. 이석범 3형제는 마을 반장과 면서기가 집에 와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비료와 농기구를 무상으로 준다"고 해서, 가입서에 도장을 찍었다. 보도연맹 가입서가 살생부(殺生簿)가 된 것이다. 이승원씨네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살짜리 동생이 석방된 지 한 달 만에 죽어....
후퇴했던 군인과 경찰이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추석 무렵에 마을로 쳐들어왔다. 군인과 경찰은 이승원 집에 총을 쏴 불을 질렀고, 불을 끄려는 증조부 이환창의 가슴을 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이승원 증언에 의하면, 마을에 온 군·경은 총부리를 들이대며 마을 사람들을 보도연맹 가족과 비가족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보도연맹 가족들은 괴산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이승원 가족 중에는 조부, 모친, 큰 누나가 끌려갔고, 3살짜리 남동생 이백원도 끌려갔다. 마을에서는 수 십 명이 연행되었고, 이들은 괴산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달 이상 구금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온갖 고초를 겪고 한 달 만에 괴산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3살짜리 이백원이가 죽었다. 모친 안혜득은 홧병으로 1952년에 사망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은 숙부 2명을 행불로 처리한 것이 그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3형제가 보도연맹으로 죽은 것이 알려지면 빨갱이 집안으로 호가 날까봐 숙부들을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그러자 불정지서에서는 새벽에 수시로 찾아 와 전등불을 비췄다. 할아버지 이윤증에게 "아들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자기들이 죽여 논 아들을 내 놓으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젖먹이 애도 경찰서에 끌려가
이석빈(70세. 괴산군 불정면)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이만증이 보도연맹으로 옥녀봉에서 학살당한 후 군경이 수복하면서 가족들이 괴산경찰서로 끌려갔다. 어머니 남상신과 젖먹이 남동생 이석분이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석방되고 젖먹이 이석분은 사망했다. 이백원과 같은 이유로 사망했다.
이런 사연들은 비단 두 집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지장리 마을 전체에 암운(暗雲)이 드리웠다. 피해 유가족들의 증언과 달리 보도연맹 유가족들이 아닌 부역자들을 괴산경찰서로 끌고 갔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한 마을에 수십 명이 부역을 할 수는 없잖은가? 더군다나 3살짜리, 젖먹이 애를 한 달여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더 늦기 전에 지장리의 음울한 역사를 햇빛에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있는 한 인권과 평화, 통일을 운운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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