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정수(精髓)다

일제강점기에 한 독립지사가 피눈물로 쓴 『석주유고(石洲遺稿)』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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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parkdo45)등록 2016.05.24 14:35

신흥무관학교 부지 매매문서 ⓒ 우당기념관


4.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만주로 망명한 독립지도자들은 동포들을 교육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이에 이회영 · 이계동(李啓東, 본명 鳳羲. 이상룡 아우) 두 사람은 봉천성에 청원하여 토지매매를 성사시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이 학교는 이회영 6형제들이 조국에서 가지고 온 큰돈과 이동녕 · 이상룡 · 김대락(金大洛) 등 독립지도자들의 열정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중국 현지 관헌들은 조선 망명객들을 일본의 끄나풀로 오해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다. 이에 경학사 사장 이상룡은 다시 유하현 지사에게 청원하였다.

벼논과 포도밭으로 변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 터 ⓒ 박도


사람이 극도로 애통하게 여기는 것 중에서 나라 없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선비가 깊이 근심하는 것 중에는 교육을 잃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학문이 얕고 짧은 사람들로서 우수하면 승리하고 열등하면 패배하는 국면을 만나 4천년 역사가 땅속에 묻히고 2천만 동포가 지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토지와 인민이 이미 나의 소유가 아니고, 생명과 재산이 이미 남에게 유린을 당하다보니까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어도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한 가닥 살 길이라고는 오직 대국을 바라보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중국과 조선 양국은 국토가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어 절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형세에 있습니다. 그 족계는 뿌리가 하나로서 평소에 형제의 우의가 있었습니다. 만약 외군의 침략을 당하게 되면 군대를 정비하여 원조하였고, 혹 거듭된 기근을 만나게 되면 미곡을 덜어서 구호하였습니다.

어찌 옛날에만 그러했고, 지금은 유독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들은 친척들과 이별하고, 조상의 묘소를 버리면서 이웃의 손을 끌어 강을 건넜던 것이니, 6~7년 이래로 우리 민족이 동성(東省, 동삼성, 곧 만주를 말함)으로 이주한 자가 수만 명에 가깝습니다. 다행히 민적에 편입되어 백성이 됨으로써 다행히 물고기가 그물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을 꾸림으로써 거의 피곤한 새가 편안히 깃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어에 "사람으로서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나라가 망해서 떠도는 우리 민족이 만약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스스로 존립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의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여도 언어가 통하지 않고, 학비를 계속 대기가 어렵습니다. 형편상 할 수 없이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찬조를 받아 사사로이 학교를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임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허(認許)를 청한 적은 없었으나 관료들의 찬조가 또한 많았습니다. 이는 대국이 너그러이 구휼해주는 은혜와 동족이 함께 장려하는 의리 덕분입니다. …

신흥학교로 말씀 드리자면 이는 저희들의 중등학당입니다. 소학(小學)의 설립이 수십 개소를 넘다보니 매년 졸업을 하는 사람이 통틀어 백여 인이나 됩니다. 소학을 마치면 중등교육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때문에 전대 청나라 선통 연간에 이 학교를 제2구의 추가가(鄒家街)에 설립하였고, 2년 후에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였다가, 올 봄에 위치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제3구의 고산자(孤山子)로 옮겨 왔습니다.

그 성격과 역사는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체조 한 과목은 곧 세계 만국의 소 ‧ 중학당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교내의 물품과 서류는 경찰에서 이미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며, 구(區)의 관원 또한 친히 와서 검사하였으므로, 그 사이에 의심을 일으킬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듣기로 관령(官令)으로 장차 이 학교를 해산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오호라, 하늘이 망국의 교민으로 하여금 영원히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도태되게 만든다면 모르겠으나, 만약 일시동인(一視同仁, 차별 없이 대하여 똑같이 대해 줌)의 사랑이 있다면, 어찌 타향을 떠도는 사람들에게 이 한 학교 정도를 허용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국이 이미 우리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토지 조세와 가옥 임대에 모두 은혜로운 조치를 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중등교육은 허가치 않아 새로 자라나는 자제들로 하여금 지식을 계발치 못하게 한다면, 이는 공화의 선정에 흠결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각하께서는 특별히 성념(盛念, 너그러운 마음)을 베푸시어 이런 사유를 간곡하게 성공서(省公署, 성의 관공서)에 아뢰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신흥학교가 영원히 존속을 보장받고 한인(韓人)의 자녀들이 소멸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 『석주유고』상권 553~557쪽 유하현 지사에게 비치는 정문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로 옥수수 밭으로 변해 있다. ⓒ 박도


이회영 6형제, 이상룡, 이동녕, 김대락 등 독립지도자들의 간곡한 청원과 그분들의 열정에 힘입어 신흥무관학교가 비로소 설립되었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정수(精髓)로 그 졸업생은 3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의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시작하여 이후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의혈단에 이르기까지 용맹스럽게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옛 청산리 전적비목으로 이즈음에는 볼 수 없다. 현재는 돌로 기념비를 세웠다. ⓒ 박도


5. 남만주 동포들에게 눈물로 올리는 글

이상룡은 서간도 망명 초기 현지인들의 배척운동을 해소하고 그들과 친화감을 도모하게 위하여 변장(變裝)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당신부터 머리를 자르고 복식(服飾, 옷의 꾸밈새)을 바꾸었다. 그러자 동포 가운데 일부는 이런 변장운동에 크게 반발했다. 이에 이상룡은 동포들에게 읍소하였다.

안동 임청각으로 이 집안에서만 서훈 독립운동가 10여 분을 배출했다. ⓒ 이항증


어리석은 석주(石洲)는 눈물로 붓을 적시면서 동포형제들에게 공경히 한 말씀 올립니다. …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두 가지의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산업입니다. 사람이 거북이나 뱀이 아닌 이상 공기로만 호흡하며 살 수 없으며, 새나 짐승이 아닌 이상 날개나 털을 덮은 채 살 수 없으니, 추위나 굶주림을 면하려면 음식과 의복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산업은 우리 사람들의 기혈(氣血)이나 명맥(命脈)이 아니겠습니까?

재산이 넉넉하면 능력이 절로 생겨나서 신체가 건강해 질 수 있고, 자손도 번성해 질 수 있으며, 재산이 궁핍하면 만사가 군색하여 질병이 그로 인해 침범하고 인구가 감소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동포들은 이역에 떠돌면서 송곳 꽂은 땅조차도 자신의 소유로 된 것이 없어서 한 톨의 곡식, 한 뼘의 베도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산업이 어찌 우리들이 먼저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두 번째는 교육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인간에게는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서 편안히 거처하며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깝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반대로 하여 "사람이 교육이 없으면 배부름과 따뜻함, 안일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세계는 인류의 일대 경쟁의 장입니다. 우수한 자는 승리하고, 열등한 자는 패배합니다. 교육은 지식을 계발하고 덕성을 기르며 체력을 단련하여 그 우승권을 차지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교육을 받지 못하여 지식과 기능이 타인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제반 권리는 모두 타인에게 빼앗길 것이니 배부름과 따뜻함, 안일함을 무엇을 통해서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인류라도 교육이 있는 경우는 문명인이 되고, 교육이 없는 경우는 야만인이 되니, 야만인이 문명인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   우리 동포가 무슨 까닭으로 조상 때부터 전래되어 온 3천리 옥토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이역에서 떠돌며 슬픈 비바람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교육이 발달하지 못하면 지식과 기능이 타인에게 필적치 못하여 남의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 생각이 여기에 이른다면 우리들은 비록 삼순구식(三旬九食, 30일 동안 아홉 번 먹음)을 하더라도 교육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석주유고』상권 559쪽 '남만주 동포에게 고하는 글'

국립묘지에 안장된 석주 이상룡의 묘 ⓒ 박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제1차 사료(史料)

오늘의 잣대로 지난 시대를 재단치 말라는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그때 우리 백성들은 나라도 없는 암흑세상이었다. 그런 캄캄한 세상에서도 "내 가족과 후손들을 일본인의 종이 되게 할 수 없다"고 고래 등과 같은 집과 문전옥답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의 후일을 기약한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낯설고 물선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일제와 맞서 투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지몽매한 동포를 가르치며 광복의 씨앗을 뿌렸다. 그 고난의 세월을 피눈물로써 기록한 글이『석주유고(石洲遺稿)』다. 이는 집안의 가보를 떠나 나라의 국보급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석주유고』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제1차 사료(史料)로 길이 보존해야 할 국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행촌학술문화진흥원 발간 『행촌회보(杏村會報)』 통권 제48호 2016년 봄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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