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우리가 해야 할 것

안희연 시인의 초대하는 의식 너머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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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정(yoyoeli)등록 2016.01.08 10:16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우리가 해야 할 것
-안희연 시인의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읽고

안희연 시인의 시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식 너머 어딘가 공간으로의 여행을 묘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녀만의 독특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풀어낸 의식 너머의 이야기는 묘하게도 독자에게 그녀가 피하고자 했던 감정으로 돌아온다.

백색 공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시집을 시작하는 시이자 같은 제목으로 쓰인 세 편의 「백색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시선을 돌린 "가시권 밖"(「백색 공간」)이자, "완전한 침묵"(「백색 공간」)이자, 침묵이 고여 갖게 된 "깊은 두 눈"(「백색 공간」)으로 보게 된 의식 너머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제목의 시 세 편이 제목 뒤에 붙이는 숫자로 나뉘지 않고, 또는 한 편의 시 안에 숫자를 붙여 엮이지 않고 시집의 시작과 3부의 앞과 중간에 배치되어있는 것이 나에게는 '같은' 공간으로 여기는 '백색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인의 성장처럼 느껴졌다.  

정체를 모르는 "견딜 수 없"음(「시인의 말」)을 해소하고자 쏟아낸 그녀의 이미지 속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고, 그만큼이나 희망이 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적절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믿는 "언덕 너머의 진짜 언덕"(「접어놓은 페이지」)은 희망이 곧잘 갖는 모호한 긍정성으로 무장한 자기 최면이 아닌, 구체적인 탐색의 과정이다. 그녀는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견딜 수 없는 무언가와 끊임없이 마주하며 내면을 여행한다. 그 여행을 통해 만난 이들은 "아이들"(「프렉털」)이기도, "남자"(「프렉털」)이기도, "노파"(「산책자」)이기도, "익숙한 뒷모습"(「돌의 정원」)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구분 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곧잘 빛을 통해 가시적인 공간, 의식 안에서 "벽의 위치를 의심하지 않"(「트릭스터)」)고 쉽사리 너와 나를 구분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트릭스터」의 존재로서 그 당연함을 의심해보고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사고'로 위장된 정치적, 사회적 '사건' 속에 목숨을 잃은 아이들과 그녀의 솔직한 만남이 담겨진 시들에서 우리도 그녀와 함께 구체적인 슬픔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여러 편으로 이어지는 시들 안에서 언제까지나 그 심연을 헤맬 것 같지만, 다시금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이 영원을 기록하지 위해"(「당분간 영원」) 묵묵히 "돌을 나르는"(「당분간 영원」) 사람으로 시를 써 나간 것 같다. "진짜는 원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그럼 이건 누구의 이빨자국이지?」)했던 우리는 막연한 빛이 아닌 구체적 실체 혹은 실제를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라파엘」)라고 질문을 던지며 그녀와 함께 "활자 밖으로 걸어나가야"(「파랑의 습격」) 하는 것이다.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슬리핑백」) 바라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우리가 의례 갖는 슬픔, 막연한 희망에 더 진지한 탐구와 이를 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모두 가엾다."는 시인의 말에서 그녀가 얼마나 깊이 "너의 슬픔"(「파트너」)을 공감하고 그 안에 구분될 수 없는 너와 나의 아픔과 대면하였는지가 느껴진다.

"감당 못할 무게이더라도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는 결연한 시인의 용기에 뜨거운 위안과 감사함을 느끼며 그녀와 함께 견딜 수 없는 지금을 철저하게 대면하고 탐색하며 살아내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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