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천만한 작업장에 안전의 꽃을 피운 군산의 마쓰시다 고노스케 ' 이정석' 대표

검토 완료

이생곤(grandl)등록 2015.12.30 17:29
일본 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성공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나는 하늘로부터 세가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 배운석 바로 이 세가지 입니다. "깜짝 놀라는 기자에게 "가난했기에 부지런히 일했고 허약했기에 건강을 돌보아 90세가 넘도록 살아있고 못 배웠기에 늘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했으니 이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타고난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승화시킨 고노스케 회장...

우리 군산에도 남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경영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현해탄을 건너 마쓰시다 회장을 빙의한듯 역경을 딛고 경영자로써 모범을 보이고 있는 군산소재 유) 삼주 및 주) 삼영종합중장비학원 설립자 '이정석' 대표를 만나보았다.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이하는 이정석 대표. ⓒ 이생곤



대한민국 크레인 작업장 안전의 중심에 선 이정석 대표

커다란 뿔테안경에 키다리 아저씨 같은 큰 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저씨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 우리나라의 크레인 안전교육을 이끌어 가는 그는 유한회사 삼주와 삼영종합중장비학원의 이정석 대표이다. 

크레인 줄걸이작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간 2,000여건의 사고, 그 중 사망자가 78명에 이르고 있다. OECD국가 중 산업재해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에서 크레인 줄걸이작업과 관련된 가장 큰 사고원인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과 자격증 없이 바로 일에 투입 되는 제도적인 문제에 있었다.
참고로, 크레인 줄걸이 작업이란 운반하는 화물에 달기기구를 걸거나 벗기는 행위를 말한다.

"사고가 났다는 소리가 들리면 제일 먼저 '살았냐?'라고 묻는 게 일상이었어요. 최하가 골절이니, 골절 정도야 사고로 치지도 않았죠. 그만큼 위험천만한 직군이에요." 2006년 유한회사 삼주를 설립한 이정석 대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안타까운 사고 소식들을 접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이 위험천만한 작업현장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줄걸이 작업공정에 대해서 이정석 대표가 시연을 하고있다. ⓒ 이생곤


크레인 가동 현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바로 줄걸이작업 안전사고였다. 불안전한 작업방법이 가장 큰 이유였고, 상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사고는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다.

크레인을 조종하는 기사들조차 정작 크레인과 줄걸이 작업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작업 기사들을 모아 교육의 기초부터 하나하나 쌓아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 줄걸이 작업교육이 열리는 자리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 그 당시엔 체계화 된 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산업안전보건교육원에서 줄걸이 안전교육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삼 일여간의 교육에 참가하였다. 그 후, 작업 시에 많은 로프를 사용하는 등 조금씩 변화를 주기 시작하였다. 손이 많이 가긴 해도 균형 잡기와 안전에 훨씬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외국인을 수용하지 않던 일본 도쿄지부의 크레인협회 교육에도 자비를 털어 참가해 일본 줄걸이작업안전 자격증도 취득하였다.

일본에서는 자격증과 별도로 법정 안전교육을 이수해야만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있었는데,

이정석 대표는 여기에 큰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2014년 10월, 국회와 노동부 등에 전국의 모든 회사들이 안전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유해·위험작업의 취업제한에 관한 규칙 개정방안 연구'를 제안했다. 현장에서 사고가 다발하는 크레인 리모컨 및 팬던트 스위치 조종 자격증과 16시간 특별안전교육에 구체적인 과목을 제시하여 근로자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안한 것이었다.

또한 작업표준, 중량물 작업계획서 등 안전수칙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하였다. 지역의 관련 업체들과 화물연대에도 무상 줄걸이 교육을 제안 하였다. 근로자들의 연령을 고려해 만든 이 대표의 '깜짝 매뉴얼'을 지금은 표준으로 채택해 사용하는 작업장이 많다. 누구나 공감은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운 일을 이정석 대표는 특유의 뚝심으로 해낸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2010년 11월에는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인 KOSHA18001을 인증 받아 사내 협력업체들의 인증 확산에 교두보 역할을 했다. 2013년 7월, 산업안전보건 강조주간행사의 위험성 평가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위험성평가 우수사업장으로 인정받아 모사인 (주)세아베스틸과 협력사들의 위험성평가 인정 확산에 기여 하였다. 올해에는 국민안전처와 KBS, CBS가 공동 주관한 2015 안전문화대상에서 최우수상인 '국무총리 표창'을 수여 받았다.

'크레인'과 '안전'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향한 그의 열정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2014년에는 천장크레인운전기능사 책을 출판하였다. 또한 크레인과 관련된 발명특허 3건, 디자인등록 3건으로 크레인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이고 있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천장크레인 학습모듈 대표집필자로 위촉되어 후학들에게 크레인 전문 지식과 현장의 실제 내용과 기술을 접목하는 국가사업에도 참여 하였다. 2015년 8월에는 (사)한국크레인협회에서 호남지회장으로 이대표를 위촉하여 한국의 크레인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개발한 크레인 전기판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이정석 대표. ⓒ 이생곤


그리고 2009년 군산 임피면에 설립한 삼영종합중장비학원은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인증을 받은 교육기관으로 전국에 몇 안되는 크레인 및 중장비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삼영종합중장비학원이 우리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지역의 주민들은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타도로 가지 않고도 취득할 수 있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 안전(安全)이다."라고. 

크레인 줄걸이 자격증반 수강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있는 이정석 대표. ⓒ 이생곤


역경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열혈남아

사회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성공'을 거머쥔 이정석 대표. 하지만 그가 걸어온 성장과정과 유년시절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익산 송학동에서 4녀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병치레에 시달렸다. 아기 때 앓았던 백일해. 지금이야 현대의학의 발달로 금방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만, 60년대 먹고 살기도 바빴던 그 때 치료약이 어디 있었겠는가. 백일해를 심하게 앓은 그를 그의 부모님은 죽은 목숨이라 여겼다. 이미 죽은 아이를 포대기에 싸 윗목에 뒀지만 천운 이었을까, 꿈틀꿈틀 대며 그 어린 생명은 차가운 윗목에서 다시 살아났다.

크다보면 누구나 백일해 쯤 겪으며 자랄 수 있다. 하지만 백일해를 앓은 뒤, 세 살이 되던 해, 그는 다시 소아마비에 걸리고 말았다. 마을에서만 9명의 어린이가 소아마비에 걸렸다. 어머니는 유명한 침술사 이야기를 듣고, 익산에서 개정까지 그를 품에 안고 달렸다. 어려운 살림에 쌀 몇가마니를 주고 침을 맞은 그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아마비를 물리칠 수 있었다.

소아마비는 완치됐지만 안타깝게도 오른쪽 다리는 힘을 쓰기 어려운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현재 그의 몸 상태는 각 수술 부위들의 지속적인 통증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밖으로 아프다고 표현은 하지 않는 상남자다. 그는 통증을 오히려 즐긴다고 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누구나 힘겹고, 슬프고 때론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정석 대표는 달랐다. 어렸지만 좌절보다는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누구보다도 더 힘차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성장하고자 노력했다.

가정이라도 화목했으면 좋았으련만, 집 안 분위기는 말 그대로 최악 이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어둡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남한테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따로 없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쏟아지는 구타에, 그는 혼이 날 짓은 모두 "내가 했다"라고 하며 형제들을 대신해 구타를 맞았다.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남매들 모두 집 밖으로 도망을 쳤다가 자식들을 찾으면 혼자 가서 맞는 꾀를 부리기도 했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도 있었지만 그는 누구 보다도 가족을 사랑했다.

누군들 그 어린 시절에 맞는 것이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하여 방패막이 되어주고 싶었다. 술로 날을 지새우는 아버지를 대신해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며 외롭게 사신 어머니는 59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 하였다. 그의 나이 29살 때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아련한 어머니의 기억이 남아 이따금씩 가슴이 아프다한다.

어두운 가정환경 탓이었을까. 어린시절 그는 참외 서리와 동네 뒷산 방화 등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동네 어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정석이랑 놀지 마라"라고 말했다. 이리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한마디로 '문제아'였다. 자신보다 어머니가 학교를 더 많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학교에선 골칫덩어리로 유명했다.

그는 학교라는 테두리가 싫었다. 아버지를 피해 친구의 자취방에서 어울리며 술과 담배를 배웠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었을 뿐더러 꼭 살아야한다는 마음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리공고에서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3학년 봄날, 문득 그는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 "아! 내가 나중에 뭐가 되려고 이렇게 살지? 이건 아니다"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서야 방황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인천에 사는 누나에게 연락을 해 취업을 명목 삼아 그렇게 고향을 떴다. 그리고 18년 간, 가족이외의 모든 이와 연락을 끊었다.

정신을 차리고 회사생활에 집중을 했지만 또다시 병마가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그 당시 허리가 많이 아파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지만 완치는 불가능했다. 그러함에도 그는 스스로를 이겨내려 질병을 숨기고 해병대에 지원했다. '내가 몸은 아프지만 가장 힘든 곳으로 가 나를 이겨 보리라!' 그리고 누구 보다도 더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고 제대를 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해병대의 일원이다.

제대 후 그는 크레인 견습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크레인의 길에 들어섰다. 욕먹으며 맞는게 다반사 였던 견습공 시절 그는 선배들에게 배운 지식들을 모조리 메모하고 암기 했다.
순탄치 않았던 유년시절, '쫓고 쫓기는 스릴'을 즐기던 문제아.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었던 그였지만,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신체적 약점을 극복해낸 사나이로 다시 태어났다.

청년시절, 작업장에서 구슬땀 흘리는 이정석 대표 ⓒ 이생곤


의리의 사나이 이정석

이정석 대표를 표현하는 또 한 가지 말은 바로 '의리의 사나이' 이다. 유독 의리를 중요시하는 그 이지만 말 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단다. "많은 사람들이 의리를 찾아요. 하지만 의리를 외치고 다니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반을 합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의리는 삶의 수단인 거죠. 신뢰를 바탕으로 내 자신에게서 묻어나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주변에서 알아요. 진짜 의리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2015년 안전문화대상 수상식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유)삼주 이정석 대표(오른쪽 네번째) ⓒ 이생곤


정당하지 못하고 부당함에 맞설 줄 아는 그는 한 때 한국금속연맹의 부위원장이자 사무차장으로 한국노총을 이끌었다. 처음 그가 노조에 발을 담근 것은 군산의 기아특수강을 다닐 때였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항상 약자였던 기아특수강의 노조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노조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늘의 장난이었을까. 노조위원장으로 시작과 동시에 회사가 부도 났다. 친구라고 믿었던 이들의 배반과 술수에 그는 상심이 매우컸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회복하여 그를 피하는 이들에게 '꼭 다시 일어나 내가 밥 한 끼 사겠노라' 다짐했다.

다짐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 놓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길바닥에 나앉게 될 상황에 처한 사원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를 따르는 동료들과 법원을 찾아다니고, 채권단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매달렸다. "우리 조합원의 자녀가 같은 유치원생 친구를 보고 숨었답니다. 친구네 아빠 회사는 안망했잖아요 라면서요, 나는 상관없지만 우리 후배들은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의 진심이 통했다. 산업은행의 승인이 나고 부도난 회사에 교육비가 지급이 되었다.

6년의 노조위원장 재임기를 마치고 그는 다시 평사원자리로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했다.  
책임이 따르는 권력,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력의 횡포를 청산하고자 노력해 온 올곧은 이정석 대표. 자신만 믿고 시집 온 아내(국미숙)에게 성공의 공을 돌리는 그의 말에 의리의 진정성이 뭍어났다.

남을 위한 사회적 봉사를 천명처럼 지키는 사람

삼영종합중장비학원에서 만난 이정석 대표는 안전모에 작업복을 차려입고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산업안전보건교육원 안전교육에 지역 대학들의 겸임교수 활동까지 하며 눈코뜰새 없이 바쁜 그는 최근엔 모교인 이리공업고등학교를 찾아 후배들에게 멘토 강의를 하셨단다.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고 딸의 권유로 시작한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고 계신다고 했다.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한국컴패션에서 2010년 7월부터 5명의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기부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2011년에는 직접 아이들이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를 아내와 딸과 함께 방문해 아이들을 만나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왔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푸단 마을에서 봉사후 주민들과 기념사진 찍고 있는 이정석 대표와 그의 아내(사진 가운데) ⓒ 이생곤


최근에는 낙도 와 산골오지에 들어가 낡은 기관을 본인의 재능으로 리모델링을 해주었고, 뜻있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 어려우신 분들의 집을 수리하는 등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봉사를 통해서 자신과 가정의 행복을 키운다는 이정석 대표는 이 시대의 참 어른이자 기업가 이다.

전라남도 완도 소재 독거노인 집을 수리하고 있는 이정석 대표 ⓒ 이생곤


어린시절 자신을 매우 고단케 했던 아버님과 이정석 대표 본인, 따님까지 3대째 대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본인들 시신 기증서에 싸인도 했단다. 그 이전에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신의 신장까지 내어준 이정석 대표, "내 주변의 어려운 사람과 동료들을 먼저 보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게 나의 인생관입니다."

요즘은 차근차근 크레인에 익숙해지고 안전수칙을 지키는 근로자들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위험천만한 작업장을 무재해 작업장으로 바꾸려는 그간의 노고가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한 지금, 안전지킴이 선두주자 이정석 대표는 안전하고 더 나은 일터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직접 발로 뛰고 있다. 본인의 사업장만이 아닌 우리지역 군산! 또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하며 그는 '더 이상 산업현장에서 우리의 부모, 형제, 자녀들이 죽거나 부모님께서 주신 소중한 신체를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강한 어투로 말한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이 살아 생전에 자주 언급했던 내용을 함께 음미해 보았다.

카리스마를 가진 경영자는 장기적인 사업 비전을 제시한다.
항상 '행동할 것인가 혹은 멈출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경영자가
입만으로 경영을 할 때 그의 카리스마는 퇴색된다.

- 마쓰시타 고노스케 -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