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유월항쟁 승리로 1988년 잠실 올림픽 경지장에 굴렁쇠가 굴러갔다!

만약 당시 6월 민주항쟁이 좌절되었다면 과연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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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전(gooam77)등록 2015.12.27 17:56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일 가운데 한반도에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을 생각해 본다. 세계 4위로까지 입상한 결실을 본 팔팔올림픽이 아직도 그때의 가슴이 퍽찻던 모습이 가슴과 머리와 남는다. 그런데 만약 87년 6월항쟁을 승리로 이뤄내지 못했다면 유치노력에도 과연 이루어졌을까?

우리나라에 군사문화가 남긴 역사들이 많다. 특히 기억되는 자유당 12년 독제정권이 4월학생혁명으로 몰락하고 민주당 신구파가 집권을 했었다. 그런데 민주혁명으로 이룬 제2공화국이 집권 8개월만에 군사 쿠데타로 군부에 정권을 빼았기고 말았다. 차라리 자유당 정권에서나 저지를 일이었다.

역사적인 6월 민주항쟁은 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로 부터 발단되었으나, 거슬러 올라가면은 1979년 12.12군사정변과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면서부터 기인한 사실이었다. 내 인생이 중반 불혹의 시대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이땅에 군사문화시초인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스스로 국가최고회의 의장으로  군정 3년에 연장을 꾀하려다 마음을 바꿔 당시 육군소장에서 별 2개를 더 달고 육군대장으로 전역식을 하면서"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는 명언을 남기고 전역했었다.

사실 그들의 당초 혁명공약에 나열한, 제1항 은인자중하던 군이 반공을 국시로 삼고 토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등, 항목에 이어 제6항에 "이와 같은 임무가 완성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라는 제6항을 슬그머니 빼버리고 어느 사이 그들이 정권에 연연하고 있었다.

이런 거짓공약을 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발하였다. "군사문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빨리 라는 술어를 만들어 낸다." 1차 선거 63년 대선에서 윤 후보에게 겨우 12만표로 이기고서 계속 2회를 하더니 헌법에 3선을 금지했는데, 앞서 이승만처럼 3선 개헌을 무력으로 단행해 1971년 3번째 출마하였다.

필자는 1회 2회 3회 모두 유권자로서 유세현장을 찾아 공명선거를 위한 파악을 위해 3선의 장충단공원을 찾았었다. 당시에 박정희 김대중 양자 후보 유세현장을 똑똑히 살펴보았다. 썰렁한 박의 유세보다 열찬 100만이 넘는 서울 유권자들의 열광을 지켜보면서 특히 영구집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김후보의 예견을 듣고 설마 했었는데 엄연한 사실이 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박후보는 눈물을 흘리며 영구집권이 아닌 이번 마지막이라며 읍소하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는 전국적으로 가열되어 영남의 유세에서는 지역감점 1호의 발언을 이국회의장이 발설했다. 만약 호남후보 장선되면 경상도 다 망한다고 열변하고 그 후로도 우리가 남이가였다.

그렇게 선거판은 부정이 얼룩지고 결과는 91만 표로 역시 군표를 생각하면 짐작한 결과였다. 대선이후 국회의원선거에 야당이 크게 약진하자 이제는 소위 남북통일의 그날까지 남북정상이 1972년 7.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해 이산가족 희망이 부풀고 이제 통일이 되는가 하는 순간 희망을 갖기도 했었다.

그러나 유신은 71년 대선에서 김후보가 폭로한 죽을 때까지 영구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심지어는 국회의원 3분의 1을 박대통령이 임명하는 소위 유신 유정회 국회의원이 있었다. 모두가 한자리 하려고 박에게 아부하고 계략이 계속되고 몰려들었다. 사실 기막힌 의회정치의 행태였다. 북은 김일성 수령체제를 주석제로 바꾸고 남은 그야말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영구집권을 위한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99%가 찬성해 연임하고 기간 6년으로 죽을때까지 대통령직을 할 수 있게된 법들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권력이 끝없이 허용하지를 않았다. 혁명을 같이하고 나라 권력서열 1위와 2위인데도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는 김부장의 독백을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사는 반면교사라고 하는데 너무나도 분명하고 뽄한 역사적 진실을 나 몰라라 하는 심정은 무엇때문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울호가 18개월이 가까워 온데도 무엇하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오늘의 현상을 보면서 의문뿐이다.

아직도 이나라에는 군사문화의 유산이 너브러져 있다. 필자가 남루하게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느낀점은 군의 정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지만 점령하면 된다"는 오직 승리만이 최고의 덕목이다. 그러기에 베트남 초창기에 많은 우리 전우가 전사하고 부상하고 고엽제를 않고 있음을 본다. 그런베트남은 지난 프랑스와 80년전쟁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과의 20년 전쟁, 즉 백년전쟁을 치루면서
그들은 대국 미국이 물러나서 민족통일을 이루었다.

당시에는 우리가 그들의 저깅었지만 오늘날에는 다행이 수교국으로 이제는 우호를 나누고 많은 기업들이 베트남에 투자를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전우가 죽은 숫자만큼 민간인 피해도 있지만 이제는 좀더 도와달라는 부탁도 하고 있다. 사실 남루한 후외는 우리는 남북을 75년 분단이 아직도 계속되고 순간순간 전쟁의 위협이 다가 오지만 그들은 오직 평화롭게 전쟁을 이겨내고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 필자는 지난 한세대를 지난 날의 기억들을 "응답하라!1988년의 이야기"를 쓰면서 역사적으로 꼭 가록할 사항이 있다. 이미 오래전에 인터뷰도 했지만 우리가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어 기록한다.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년전이다. 신군부가 12,12와 5.18로 정권을 잡고 제5공화국으로 출발하여 84년 10월8일 당시 버마는 북한과 수교국이고 우리와는 미 수교국이다. 그런데 전대통령은 각료와 보좌진 27명을 대동하고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버마를 방문, 랑군 아웅산 묘지를 방문예정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인솔자가 5분 늦어 나머지 수행한 함병춘실장 김재익 수석 등이 도열하고 있을때 폭판이 터지고 말았다.

함병춘 실장을 전대통령은으로 착각하여 그만 20여명이 사만중상을 입고 나머지 순방을 취소하고 그만 황급히 구기국하고 말았다. 수교국도 아닌 버마(지금은 미얀마)에 외 순방코스에 들어 갔을까? 알려진 버마에는 실력자 네윈 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구데타를 하여 임기후에도 정권을 좌지우지 하는 막강한 실력자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과연 그들은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가 하는 방문이었다.

많은 인재들이 죽음을 당하고 부상당하여 대통령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저 쉬쉬 하면서 구 누가 별로 관심도 없이 흘러간 역사의 뒤안길 정도로 생각을 한 터이다. 그러나 필자는 6월항쟁 당시를 눈으로 확인하고 군력의 움직임을 보면서 더욱 더 관심을 갖고 역사를 봐오고 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학생의 물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은폐하려다 더욱 커진 정국이었다.

학생이 사망했으면 진실되게 진상을 밝혀야 하는데 오히려 은폐하려다 더큰 결과를 초래했다. 그 정도면 정국을 안정해야 하는데도 물론 직선제 개헌요구가 야당과 재야로부터 강했지만 소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있어 정국은 초 긴장이었다. 여기에다 6월9일 이한열 학생의 위급은 더욱 정국이 긴장되고 이어 6.10 민주항쟁의 시작은 그야말로 초긴장 대결이었다.

필자도 참석한 5.17 광주민주항쟁 휘생자 추모미사가 김수환 추기경 과 김승훈 신부의 집전으로 명동성댕에서 있었다. 광주의 죽음과 부상 슬픔에 대한 위로의 미사는 맨끝에 박군 고문치사에 2명 경관이 아닌 3명의 주범경관이 있다는 폭로로 정국은 벌집을 쑤신듯 했다. 그렇지 안해도 분노의 학생과 시민들이 박종철 살려내라는 항의 낵타니부대 점심항의 등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정국은 4.13호헌조치가 계엄령을 부르듯 한 그들의 상황은 결국 여의도에 군대를 미리 출동시키고 각 군에는 4.13 호헌조치부터 출동대기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발상의 전환을 해야할 위정자는 오히려 부추기는 강경대처는 아마도 반짝 게엄령이라는 무서운 작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기에 4.13 조치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들의 민심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부산 광주 전국의 도시는 이미 미주혁명의 대오를 정리고 일전을 불사할 태세라는 정보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6월17일 위정자는 반짝 계엄을 발동하여 사태를 수습하여 자신들이 구상한 내각제 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우방들이 동의도 만무하고 또한 국내사정도 여의치 않아 결국은 계엄 생각을 접았다.

그리고 나온게 6.29선언이었다. 만약 그 선언이 없었다면 6월혁명으로 발전하면 모두가 다친다는 그들 전략이 "국민에게 항복한다"는 명제였지만 일부에서는 6.29 속이구였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사실 6월항쟁은 박정권 유신이후 15년동안이나 장충체육관 선거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겠다는 당연한 주장이고 권리의 발동이었다. 결국은 정의구현사제단의 87년12월 대선 피시 부정선거라고 선관의에 소송까지 제출한바 있으나 결국은 결과가 없고 말았다.

기억하는 응답하는 88년을 생각하다, 그때 만약 군대가 니왔다면 다음해 올림픽은 나라는 어찌 되었을까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그만이라도 나라가 만하라는 법이 없구나 하는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응답하라 1988년 응모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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