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제석사(鷄龍山 帝釋寺)를 찾아서

계룡산 제석사 해봉스님 열반에 들어

검토 완료

조성우(vip001)등록 2015.10.26 11:38

제석사 해봉스님 ⓒ 조성우


계룡산 제석사 해봉(서용준)스님이 99세의 나이로 지난 2015. 10. 16. 09:30 부처님 품으로 입적했다. 10월 18일 금산 신안사에서 다비식이 있었으며, 사리모양도 다종 다양하게 50과 이상 나왔다. 해봉스님은 하루는 5시부터 법당에서 금강경 독송 등 새벽 예불을 한후 아침공양을 했다. 12시경 북쪽을 향해 30분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하고,  저녁에는 저녁예불을 했다. 중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국수만 먹었고 오신채<파(양파), 마늘, 부추, 다래, 흥거(무릇)>와 육류는 물론 우유도 먹지 않았다. 공양시간도 정해져 있어 이시간에 공양을 못하면 다음 공양시간 까지 공양을 하지 않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했으며, 계룡산에 입산한지 70여년, 제석사에서 40여년간 오직 3끼를 국수만 먹으며 민간인 통제지역 산중에서 한평생을 국태민안과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기도하였다.

제석사 다비식을 마치고 제석사로 돌아오는 스님과 신도들 ⓒ 조성우


해봉스님은 한평생 병원에 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 신도가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4년전(2012. 12월) 어느 일요일에도 해봉스님께서는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의료진을 부르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셨고, 다만 신도중에 예비역 간호장교 출신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겼다며 입적에 임박해서도 당시 그 응급처치를 했던 신도만 찾았을 뿐 어느 의료진도 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2015. 10. 18. 해봉스님은 금산 신안사 다비식 장소로 모셔졌고 제석사는 일부 몇몇 신도만 남아 있었는데 노루와 멧돼지가족들이 제석사 마당으로 들어와 밤새 스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밤을 지켰다고 한다.

제석사 각왕전 ⓒ 조성우


해봉스님이 입산하여 70여년을 살아온 계룡산은 계룡시, 논산시, 공주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26m의 국립공원이며, 정감록(鄭鑑錄)에서 주장하는 신도읍지로 유명한 신도안의 계룡산 민간인 통제지역에 제석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인 1983년, 3군본부 이전사업으로 '6·20사업'이 실시됐다. 620사업은 1983년6월20일 결재를 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20사업으로 신도안에서 1,136세대 6,381명의 민간인과 130여개의 종교단체가 철거됐다.
제석사(帝釋寺) 해봉스님은 제석사는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을 기도하는 기도도량이란 점을 강조하며 67세의 늙은 몸으로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때 까지만 수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수많은 고초를 감내하며 노력한 덕분에 결국 군 당국에서 이를 수용함으로써 유일무이하게 제석사만 철거되지 않고 남게 되었다. 해봉스님이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사였다는 설도 있지만 국가의 안녕을 기도하는 기도 도량으로 전두환대통령과 불심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석사 각왕전 내부 ⓒ 조성우


보편적으로 사찰의 중심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대웅전이 있지만 제석사는 대웅전이 없고 각왕전(覺王殿)이 있다. 오직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 국태민안을 기도하는 기도도량이다.

제석사 소법당(강당) ⓒ 조성우


이곳을 소법당 또는 강당이라고 합니다. 소법당에 앞에 붙어 있는 "약로금(躍爐金)" 이라는 현판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내용은 "쇠를 녹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지만 불교의 윤회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듯 보인다.

제석사 약노금(躍爐金) ⓒ 조성우


현판의 모양이 누에가 허물을 벗고 - 번데기- 나방으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이 과정을 통과하면 도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가 내제되어 있다고 한다. 소법당(약노금) 앞에는 뽕나무가 있는데 심은것이 아니고 자생한 뽕나무라고 한다. 전에는 오래된 뽕나무 고목이 마당의 중앙에 있었는데 각왕전을 가리고 있어 베었다고 한다.

제석사 뽕나무 ⓒ 조성우


사찰의 마당에 왜 뽕나무가 있을까! 별 생각없이 지나쳤지만 33년간 제석사의 일을 돌봐온 신도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뽕나무 한그루도 다시 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각왕전 뒤편으로 산식각의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석굴에 노인과 호랑이 모습으로 묘사된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의 산신각은 토굴에 설치되어 개방되어 있다. 산신각은 한국 사원의 특색을 보유하고 있는 전각의 하나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지만, 불교에서 우리의 재래신앙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畫)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는 곳도 있다.
산신각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현재 산신각에서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기도가 많이 행하여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다. 우리 고유신앙을 소중하게 여긴 조상들은 불교의 석가모니불보다 높의 위치에 우리의 토착신을 숭배하며 불교문화를 받아드린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 계룡산의 지명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무렵 무학대사 등이 와서 보고는 "이 산은 한편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고, 또 한편으로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니 두 가지 모양을 모두 따서 계룡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계룡산 중에서도 대궐터가 있는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는 특히 풍수설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전설에 따르면 동추에는 자룡(雌龍)이 살고 서추에는 웅룡(雄龍)이 살았다고 하여 각각 암용추·수용추라고도 부른다.

계룡산 암룡추 ⓒ 조성우


1924년 동학의 한 교단인 시천교 제3세 교주 김연국이 황해도와 평안도의 신도 약 2,000여 명을 데리고 계룡산 기슭 용동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계룡산 신도안 일대에 종교촌이 형성되었다.
1983년 3군본부 이전사업 시행으로 모두 이주당하기 전까지 60여 년간 한국 신흥종교의 메카로서, 민중신앙의 집산지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아 왔다. 신도안이 종교촌으로서 그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당시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일반 민중은 평화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신천지를 기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민중의 종교적 열망에 부응한 것은 개신교의 말세 재림신앙,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정감록의 정도령 출현신앙, 정역의 개벽운도신앙 등이었다.
이처럼 신도안에 종교촌이 형성된 직접적인 이유는 한말에 민간에 널리 유포된 비결서 정감록의 예언이 이곳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민중들의 믿음 때문이다. 정감록을 비롯한 예언서에 현세는 쇠운이 다가왔으므로 이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세사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고 말세가 되어 운세가 쇠진해 가면서 정도령(鄭道令, 正道令)이 나타나서 새로운 운세를 열어준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구원자 즉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원사상은 현실을 부정하고 십승지의 피난처를 찾는 은둔주의적 풍조가 나타나기도  했다. 

제석사 일주문 ⓒ 조성우


6. 20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계룡산은 신흥종교와 무속의 메카로서 많은 신도들이 왕래를 했을 길이지만 지금은 통제구역으로 신도들이 발길이 거의 없는 끊긴 상태다. 신도안 계룡산 기숡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제석사는 노승이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기도도량으로  전두환정권의 군부독재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찰이다. 이제 6.20사업을 시작한지 33여년이 훌쩍 지났고 3군본부가 입주한지 26년이 지났다.
이곳은 군의 보안시설이 없는 산중으로 구룡관사 앞에 철문을 조금만 뒤로 옮겨 제석사의 신도와 국민들이 안보도량인 제석사에 자유롭게 왕래하며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을 기도하며 우리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계룡시와 계룡대의 적극적인 협조와 배려가 요구된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신도들의 발길을 막는 철문을 뒤로 하고 40여년을 국수만 드시며 오직 국태민안과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한평생 고행의 길을 택하신 해봉스님의 뜻을 계승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제석사의 일주문 뒤에 작은 비문이 있다.

네마리의 용은 각자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팔각등은 속세의 중생들 마음에 등불이 되니
어찌 자비를 따르지 않으리오.
연화는 오랜 세월속에 불교의 상징이었으며
힘찬 호랑이의 모습은 동양의 상징이었다.
"산은 산이요"라는 깊은 뜻을 중생들 마음에
등불밝혀 부처와 함께 안식하여라.

또한 제석사의 맞은 편 산자락에 계룡산 삼신당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백일 기도를 한곳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때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계룡산 삼신당(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9호) ⓒ 조성우


제석사와 마주보이는 곳에 위치한 삼신당은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후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명당지로서 신라시대에는 왕용암, 고려시대에는 수심대, 조선시대에는 삼신당으로 불리웠다 한다.
1889년 평양에서 출생한 정원강은 수도생활을 위해 21세 때인 1910년에 계룡산을 찾았으며, 백옥성 도장에 머물면서 백옥성의 딸과 혼인을 하고, 천단, 정심원·태상전, 산신각, 칠성각, 용궁 등을 연차적으로 건립하여 삼신당 지역을 재정비하였다.

계룡산 삼신당 안내판 ⓒ 조성우


서울의 삼각산에 기도하러 다니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기도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사용하였고, 정원강은 1943년 6월경에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경북 상주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도중 사망했다.
그 후, 장자(長子)인 정운복이 대를 이었으나 일제의 강제징집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부인(박영숙)이 주관하여 관리·운영해오다가 1984년 4월 삼신당 지역의 건물을 남겨 놓은 채, 대전시 서구 장안동으로 이전하면서 삼신당 건물 그대로 신축하였다 한다.

계룡산 삼신당 내부 ⓒ 조성우


'계룡대(3군본부)'내 암용추 인근에 위치한 계룡산 삼신당은 1925년에 정원강이 삼신당을 설립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장소로서 1983년의 620사업 시행 시 모든 무속·신흥종교 시설들이 철거되었으나 역사성과 주변 경관 훼손방지를 위해 존치해오고 있는 상태이다. 각종 무속·신흥종교의 요람이었던 신도안의 종교적·향토적·역사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 장소로서 역사적·민속학적인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제석사의 이모 저모

제석사 표지석 ⓒ 조성우


제석사 팔각등 ⓒ 조성우


제석사 석불 ⓒ 조성우


제석사 각왕전과 석탑 ⓒ 조성우


제석사 각왕전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요사체 ⓒ 조성우


제석사 해봉스님의 털신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오르는 길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입구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 내부 ⓒ 조성우


제석사 산신각에 있는 약수 ⓒ 조성우


제석사 해봉스님의 기도처 ⓒ 조성우


제석사 종 ⓒ 조성우


제석사 해봉스님 ⓒ 조성우


덧붙이는 글 계룡일보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