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어오라고 공장 보내지 않아서 고마워!

곱게 자란 아내가 공장에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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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규(kimsea6)등록 2015.08.16 16:18
돈벌어오라고 공장 보내지 않아서 고마워!

'공순이'는 1960, 70년대 생이다.
구로공단의 어둡고 칙칙한 뒷골목에서 탄생한 산업화의 산물.
초등학교를 마친 우리 누이들은 너도 나도 보따리를 이고 서울로 갔다.
그래서 공순이라는 이름에는 고향을 떠난 누이의 땀에 절은 속살 냄새가 났다.
가난한 부모와 철모르는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세끼 라면으로 버텼던 우리 누이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동자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숨 막히게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자신들의 존재가 그렇게 부정당했다.
정부는 그들에게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영광스런 훈장을 붙였다.
'산업전사'라는 투쟁적인 이름도 선물로 주었다.
노동자 대신 '근면한 노동자(근로자)'라는 이름도 부여받았다.
근로자는 힘이 든다고 꾀를 부려서는 안 되었다.
정치를 보고 아는 채 해서도, 사회적인 문제에 투덜대서도 안 되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스런 조국과 재벌,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바치는 것만이 근로자가 지켜야 할 수칙 제1번이었다.
사장님이 잘 되는 것은 내가 잘되고,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조국이 근대화 되는 것.
그래서 하루 12시간, 15시간, 때로는 철야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손마디가 부러지도록, 손톱이 닳아 없어지도록 일을 했다.
두 말 없이 하는 것만이 참 노동자요, 조국근대화의 기수가 갖춰야 할 자세였다.
그렇게 우리의 누이들은 공순이가 되었다.

지난달부터 아내가 공장에 나간다.
이제는 조국 근대화도 필요 없는데,
100억불 수출탑도 필요 없는데,
아내는 주부에서 공순이로 전업했다.
아내는 아침 8시 50분이면 어김없이 긴 탁자 앞에 선다.
하루 종일 상자를 접고, 굽은 손으로 초콜릿과 사탕을 넣는 일이 아내의 업무다.
상자를 옮기고, 때론 라인(컴베이어밸트)을 타기도 한다.
아내가 뜬금없이 공장에 나가게 된 것은 '이사' 때문이다.
19년동안 살았던 낡은 아파트를 탈출해서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8월 1일로 이사 날짜가 잡히면서 아내의 마음도 분주해졌다.
이삿짐센터와 계약금도 주고받고 내부수리도 업자들에게 맡겼다.
나를 졸라 동방, 서방으로 돌아다니며 가구들을 관찰했다.
그러다 몇 주 전 용인의 가구 할인점에서 우아하게 만든 공주풍의 '소파'에 시선이 꽂혔다.
아내가 좋아하는 프로방스풍의 우아한 소파.
소파 가격은 무려 1백 6십만 원이나 되었지만 나는 아내의 마음을 받아들여 오케이 사인을 냈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며칠 고심을 하던 아내는 팔을 걷어 부치고 산업전선에 나섰다.
새집으로 이사하는데 소파 한 개쯤은 자기 힘으로 사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 제과회사 하청기업의 시한부 반장이 되었다.
일할 아줌마들을 모으고, 시간당 임금을 책정하고,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운영하는 일도 아내의 몫이었다.

첫날 일하고 와서 아내는 침대에 쭉 뻗었다.
며칠을 일하고는 남을 날짜를 손에 꼽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0일쯤 지나서는 끙끙 앓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나는 틈틈이 가사노동을 돕고 마사지를 해주며 응원했다.
주말에 집에 가져온 일거리는 아이들에게 앵벌이를 시켰다.
아내의 저녁 도시락 지원이 끊긴 중3짜리 아들은 친구들의 남은 도시락을 얻어먹고 다녔다.
그렇게 가정도, 아이들도 팽개치고 정신없이 일하러 다니던 아내는
한 달이 다 되 가던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지금껏 돈 벌어오라며 공장에 내보내지 않아서 고마워!'

그 말에 나는 빙긋 웃는 것으로 응답했다.
아내가 철 들었다. (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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