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농악과 판소리 어우러진 공연 보러오세요"

전북 한옥상설공연 '도리화 귀경가세' 이끄는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 인터뷰

검토 완료

이가람(dostoevsky)등록 2015.07.08 17:28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은 올해 전북 한옥상설공연 고창 대표작인 '도리화 귀경가세' 팀의 단장을 맡고 있다. 조직을 이끄는 대표로서, 굿패를 이끄는 상쇠로서, 무엇보다 무형 문화를 계승해가는 전통 예인으로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지난 5월 전북 고창군 성송면 고창농악보존회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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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이 전북 한옥상설공연 '도리화 귀경가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홍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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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화 귀경가세'

Q : 어떤 계기로 한옥상설공연을 올리게 됐는지요.
A : 올해 고창농악보존회(이하 보존회)가 창립 30년을 맞이했고, 농악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고창의 무형문화유산 자원인 농악과 판소리를 가지고 고창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이야기로 만들까 고민하다 고창 출신의 위인을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마침 올해 1월 전라북도의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 공모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구체화 작업을 시작했어요. 운 좋게도 우리 작품이 선정돼 무대화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겁니다.

Q : '도리화 귀경가세'는 어떤 공연인가요.
A : 간단히 정리하면 고창의 이야기를 농악으로 풀어낸 작품이에요. 판소리 이론가인 동리 신재효 선생과 그의 제자이자 조선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어요. 남녀 간의 격정적 사랑이라기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사랑,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담겨 있죠. 이 공연에서 굿패는 두 캐릭터의 그리움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가 돼요.

Q : 올해 말 개봉할 예정인 영화 '도리화가'와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A : 영화 '도리화가' 개봉 소식은 우리도 공연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에요. 절대 따라한 거 아닙니다 (웃음). 고창의 대표 브랜드 공연을 만들자니 고창 출신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필요성이 있었는데, 동리 신재효 선생과 진채선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 거죠. 영화에는 배우 류승룡씨와 수지씨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작 규모가 꽤 커 보이더라고요. 같은 소재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둘 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Q. 이번 공연이 고창농악보존회에서 최초로 외부에 연출을 맡긴 작품이라고 하던데요.
A : 30여 년간 굿을 치면서 자체적으로 연출을 해 왔었는데요. 저희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더 상승시켜줄 전문가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고창농악을 하면서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을 만났고, 그 결과 30여 년 동안 마당극 판에서 잔뼈가 굵은 연출가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어요. 이번 공연은 연출뿐 아니라 음악, 안무까지 전문가를 영입해 체계적으로 준비 하고 있어요. 보존회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마침 그분들도 함께 작업할 생각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죠. 만약 이번 작품의 평가가 좋으면 계속해서 이런 시도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Q : 회장님이 소개하는 공연의 관전 포인트는.
A : 이 작품의 장르는 '버라이어티 감성농악'입니다. (웃음) 볼거리가 다양한 농악이라는 의미죠. 작품 안에 나오는 세부 장르로는 농악, 소리, 극, 춤, 인형극 등 다채롭지만 어느 한 장르로 치우치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 이번 공연을 '종합적 전통예술' 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이 고창농악보존회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 홍정후


※ 고창농악 이야기

Q : 고창농악과 보존회에 대한 설명 부탁드려요.
A : 고창농악의 역사는 적어도 300여 년 됐어요. 호남우도농악이면서 영무장 농악의 전통 계보를 잇고 있는 농악입니다. 일제강점기 문화말살 정책과 새마을운동 시기에 미신타파운동을 벌이면서 전통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했죠. 그렇게 맥이 끊겨가던 고창의 농악을 1985년 고창문화원장인 이기화 선생님께서 부활시키셨어요. 고창의 각 마을에서 굿깨나 친다는 어르신들을 모셔 놓고 농악단을 만드신 거죠. 그게 고창농악보존회의 탄생 배경이에요. 1998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6호로 저정되었습니다.

Q : 지금은 보존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A : 고창농악 보존회는 고창농악전수교육관을 위탁운영하고 있구요. 교육, 공연, 체험등의 사업을 하고 있어요. 주요사업으로는 고창농악 전수, 고창농악문화재 발표회, 고창농악경연대회, 고창굿 한마당 등이 있지요. 회원은 70여 명 정도 되는데 고창농악 이수자 및 일반 회원 분들이 매주 금요일 굿 모임을 해요. 친목 성격의 연습 모임이죠. 보존회원은 대부분 고창 주민이이에요. 이수자들 중심으로 주요 사업들을 진행하구요, 일반 회원분들은 고창농악의 전통굿을 잇고 있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보존회 입장에선 소중한 씨앗 같은 분들이에요. 면 농악단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시고, 고창농악 메인 레퍼토리 '풍무' 공연을 올린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시고 연희자로서 무대에 서주시거든요. 아주 멋진 분들이에요.

Q : 전수는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A : 1993년부터 전수를 시작했어요. 아무리 훌륭한 무형의 문화유산도 이을 사람이 없으면 사라지잖아요. 처음엔 대학교 풍물패를 위주로 전수를 시작했지만 1997년부터는 읍·면 농악단 전수도 하게 됐어요. 아무래도 고창농악이 성장하기 위해선 고창 주민이 움직여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이후 2001년에는 전북도민체전 개막공연으로 고창군 14개의 읍·면 농악단원 500여 명과 함께 굿판을 벌인 적이 있어요. 10년이 넘었어도 그 판을 잊을 수 없는 게, 이 땅에서 사라질 뻔한 농악을 10여 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소생시켜낸 판이었기 때문이에요. 그 이후 매년 고창농악경연대회를 열어요. 지금은 고창농악의 다양한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일종의 지역 축제로 자리매김했어요.

Q : 전수를 시작한 지 20여 년이 흘렀으니 정말 많은 전수생을 배출하셨겠어요.
A : 전국의 전수생들은 고창농악의 힘이죠. 1993년부터 시작했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네요. 그동안 배출된 전수생만 해도 어머 어마 하게 많죠. 고창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고창 홀릭이 되어버린 고창농악의 보물들이죠. 1년에 여름,겨울방학을 이용하여 7박8일 일정으로 14주차 정도 전수를 해요. 처음엔 대학 풍물패 위주였다면, 점차 고등학생이나 외국인, 개인 전수생들도 농악을 배우러 고창농악전수관을 찾고 있어요. 내년에 고창풍물소리 테마파크가 완공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겠죠.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 이명훈 고창농악보존회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홍정후


※ 예인 이명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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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떻게 농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A : 고창여고에 다닐 당시 학교에 농악패가 있었어요. 그때 막연하게 '대학에 가면 장구를 배워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1988년 서울예술대에 입학했는데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저를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받아주지 않았어요. 포기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민요패 선배가 저를 받아줬어요. 장구도 배울 수 있고, 틈틈이 지방을 다니며 농악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고향인 고창의 농악을 알고 싶어서 고창문화원을 찾아 갔다가 황규언 선생님을 소개받아 장구와 꽹과리를 배우게 된 거예요. 고창 오거리당산제때 60-70대 어르신들이 함께 굿 치는 모습을 봤는데 완전 감동을 받아버린 거죠. 굿의 신천지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웃음) 치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가락과 몸짓이 멋들어지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으며, 보는 사람 모두를 즐겁게 놀 수 있게 만드는 판이었어요. 그때 고창에 내려와 굿 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선생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수받았죠. 그러다 1993년에 좀 더 제대로 국악 공부를 하고 싶어서 전북대 한국음악과에 들어가게 됐어요.

Q : 고창 출신이어서 고창농악에 마음이 동한 게 아닐까요?
A : 전혀 아니에요. 저의 고향 고창농악이 궁금하여 고창에 내려오는 계기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굿을 치는 고창의 어르신들께 반했기 때문에 마음이 동했다고 볼 수 있어요. 고창농악이 가장 좋은 이유는 다양한 가락과 몸짓, 굿등을 직접 몸으로 가르쳐주신 어르신들이 계셨기에, 그리고 그분들의 굿치는 모습에 반한 계기가 제가 고창에 있는 가장 큰 이유이지요. 고창농악 때문에 고창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Q : 지역에서 '여성'농악인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A : 아무래도 여자이기 때문에 제약이 있었죠. 집에서는 아버지가 집안 망신시킨다고 싫어하셨고, 일부 선생님들께서는 "명훈이는 시집가면 못하는데 왜 가르치느냐"고도 하셨어요.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못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젊은 여성이어서 할아버지 선생님들께서 많이 예뻐해 주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세월이 흐를수록 제가 여성이어서 더 좋은 점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힘이 부칠 때도 있지요. 그럴 때는 오랫동안 옆에서 함께해온 사람들을 통해서 힘을 얻곤 합니다.

Q : 예인 이명훈의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A : 5년 전 즈음 굿쟁이로서 개인 발표회를 가졌어요. 살다보니 예인으로서의 이명훈이 아니고 보존회의 대표 이명훈이 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굿 치는 이명훈으로서 인생을 되돌아보자는 의미로 개인전을 연 것인데, 개인 발표회라기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굿을 무대에서 한번 정리하고 가보자 하는 의미가 컸었어요. 그때 저 스스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넓어졌고, 일 하는 것도 훨씬 즐거워졌어요. 그래서 50세가 넘으면 한 번 더 진짜로 개인전을 갖고 싶어요.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네요.

Q. 마지막으로 작품에 대한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A : 무형 문화유산의 재산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행할 사람이 없으면 순간에 사라져 버리죠. 제가 어른들의 몸짓에 반해 이 길을 택했듯, 누군가에게 우리의 것을 알리고 보여주기 위해선 윗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어주는 중심에 있는 우리들이 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죠. 이번 공연은 다양한 장르가 모여 우리 전통 예술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매력을 뿜어낼 거예요. 무엇보다 그리움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감정선을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가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자신만의 '그리운 이'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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