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쌍용자동차 투쟁, 반드시 이길 겁니다"

[사람들이 만난 사람들 ⑪]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김득중 지부장

검토 완료

김연우(aykim0057)등록 2015.04.27 18:05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해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 기자말

4월 1일 오후, 오랜 투쟁 속에서도 공장 앞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인터뷰 장소인 공장 앞 사무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사무실 안은 사소한 농담들로 웃음꽃이 피어났고 오석천 조직부장님이 타주신 커피향기로 사무실 전체가 훈훈했다. 사무실은 몇몇 노조원 분들이 생활하는 공간답게 잘 정리되어 있었고 인터뷰 하는 날이 마침 민주노총 총파업 찬반 투표일이어서 테이블 한 켠에 투표용지와 투표함이 놓여있었다. 다음은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김득중 지부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그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이다

토크콘서트 <사람들> 팻말을 들고 있는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 김득중 지부장이 “나는 쌍차 투쟁 일곱 번째 희망의 봄을 동료들과 만들어가고 있는 쌍차 지부장 김득중입니다”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있다. ⓒ 사람들


— 해고 통지를 받기 전까지 쌍용자동차에서 얼마나 근무하셨고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는 93년도 입사해서 2009년도에 해고가 되었으니까 햇수로 16년정도 근무를 했고, 주로 품질 쪽 일을 담당했어요. 차에 문제가 있는지, 작동이 안 되는 곳은 어디가 있는지를 검사하고, 차량의 결함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수정해 나가는 일이었어요. 마지막에 해고되기 전 4년 동안은 다른 일을 했었는데 그 일도 품질 관련 일이었고요. 해고 전 7개월은 또 노동조합 간부로, 조직쟁의실장으로 있었습니다."

— 금속노조 활동은 언제부터 하게 되셨나요?
"저희는 '유니온숍(고용된 노동자가 일정기간 안에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어야 하는 노동조합 가입제도)'이기 때문에 입사 동시에 의무가입이에요. 물론 3개월이란 수습기간이 있긴 하지만 노동조합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고요. 지금은 복수노조 때문에 분리되었지만 당시에는 '유니온숍'이어서 무조건 가입하는 것이었습니다."

— 2009년 4월 8일 정리해고 통보 후 희망퇴직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리해고 통지를 받을 당시 제가 조직쟁의실장으로 노조에 있어서 희망퇴직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었어요. 다만 희망퇴직으로 떠나려고 하는 동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켜잡을까, 멈추게 할까 하는 고민 때문에 수개월 동안 밤낮으로 조합원들을 만나러 다녔죠. 함께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도 했고 이렇게 설득하러 다닌 계기는 무엇보다 억울함이었어요.
사실 전년도까지 아무런 문제없다는 회사가 갑자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모든 문제의 원인들이 현장에 있다'고 하는 게 상당히 의아했죠. 그런 것 관련해서 책임이 어디에 있냐는 것에 대해 노동조합에서 교육하게 되었어요. 조합원들 교육을 끊임없이 했고, 집회도 했고,"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서 노동조합에서 주로 활동하셨는데 작년엔 직접 정치참여 의사를 밝히셨어요. 7.30 평택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사실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가 노동자, 서민들한테 다가오지 않잖아요. 특히나 저희 같은 경우는 2012년도에 대선국면에서 쌍차 문제가 한창 쟁점이 될 때가 있었는데 모든 후보들이 국정조사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당선되고 몇 개월 안 되어서 모든 공약들이 물거품이 되었어요. 이때 국정수사 과정을 보면 핵심을 전혀 건들지 못하고, 쳇바퀴만 도는 수준이었어요. 그리고 당시 야당도 여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당시 꾸준히 쌍차 문제 해결을 주장했던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마저도 의원의 쪽수문제라는 현실적 문제로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좀 했었어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누군가는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쌍용자동차(S) 뿐만 아니라 스카이엠(SKYM)이라 이름까지 붙었던 밀양(M), 강정(K), 용산(Y)과 장애인분들 등 이분들과 쭉 함께 연대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가 노동문제에서 그치지 않는 삶의 아픔인데도 그 누구도 이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작년엔 세월호 사고가 있었잖아요. 세월호 사고 후에 발생되는 몇 개월간의 과정을 봐서도 누군가는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농민, 서민, 노동자를 진정으로 대변해주는 사람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우리의 문제인 정리해고 노동자의 문제도 그 아픔을 갖고 있는 당사자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에 출마하게 됐죠."

— 작년 11월, 사법부가 '쌍용자동차 해고자 153명의 해고무효소송'에 대해 스스로의 판결을 뒤엎고 해고는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렸어요. 그 후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지금 파기환송심 재판에 가있는데 일단 파기환송되면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근데 어렵다고 그만 둘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작년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선정한 2014년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쌍용차 정리해고 재판이 1위였어요. 그만큼 대법원의 정리해고 쌍용차 판결은 정말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정치적 판결이 아니고서는 이런 판결을 낼 수 없다는 것이 법조계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인 거예요.

그리고 대법 판결 후에 변호사 세분이 추가로 합류했는데요, 그래서 현재 저희 법률대리인이 9명이에요. 회사는 19명이고요. 거기는 뭐 대법원, 대법관출신, 서울고등법원장 출신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요. 저희는 내용으로, 사측은 정치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흰 계속 대응하고 있습니다. 첫 파기환송심 재판이 4월 15일이에요."

— 아직 시작하지 않았네요. 파기환송심이 끝나려면 꽤 오래 걸리겠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고등법원에서 한번 했었고 물론 이제 새로운 사실심이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얘기해 볼 수 있는데, 이미 다뤘던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등법원이 그걸 뒤바꿔내기는 힘들거에요.

그동안 대법판례가 별로 없었는데 작년 4월경에 그런 대법판례가 하나 있었어요. 노사가 맺은 고용안정협약서, 약정서 등등이 있으면 고용안정협약이 유효하다는 것이 대법판례로 나왔거든요. 저희는 상하이차로 매각된 후에 매년 고용안정협약을 썼어요. 근데 이거를 이번 재판 때, 대법 때까지는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래저래 대법파기환송이 되고 나서 저희가 지금까지 하지 않았고 싸우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쏟아 붙자고 해서 이 문제도 저희가 심층적으로 환송심에 적용할 예정입니다. 어렵지만 기존의제를 중심에 두고 새로운 것을 집어넣어서 진행 할 생각이에요."

세 번째 굴뚝농성, 그들은 왜 또 다시 굴뚝위로 올라가야만 했나

쌍용자동차의 모기업인 마힌드라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이 14일 오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본사를 방문한 가운데,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70m 굴뚝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33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깔개 위에 청테이프로 'Let's Talk'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 작년 12월,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공장내의 70m 굴뚝에 올라 세 번째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참고기사: 쌍용차 해고노동자, 평택공장 70m 굴뚝서 고공농성) 올해 4월에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내려오기까지 101일이란 시간이 걸렸는데요. 농성에 돌입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저희 해고무효 확인 소송이 11월 13일에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되었어요. 우리가 1심에서 이기고 고법에서 패소했더라면 대법에 거는 희망이나 기대가 적을 수도 있었겠는데, 고법에서 이기고 또 충분하게 감정평가도 다시 하고 그랬을 때라 법률대리인들은 반반이라고 얘기했지만 많은 조합원들은 그래도 희망을 갖고 있었죠. 근데 그날 파기환송이 된 거에요. 그날 이후에 사실은 간부들도, 조합원들도 분노나 울분이 말할 것도 없었죠. 또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정리도 하지 못했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한동안 특별한 활동 없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11월 말까지 열흘 정도 우리들끼리 못했던 수련회를 갔다 오기도 하고, 시간을 내서 아이들하고 같이 가족과 보내면서 일상을 찾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투쟁을 준비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하고 지부 전체에서 회의했었는데 '그러면 집단 단식을 하자'라고 해서 단식 결의를 했었어요. 그런데 시행하기로 한 4일 전에 두 동지가 올라갔어요.

두 동지가 올라가서는 많은 언론을 통해서 메시지가 갔잖아요. 사법권과 정치권과 많은 사람들의 무시와 외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문제를 끝내기 위해서 공장 안 동료들과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정말 이 문제를 끝내고 싶다는 절박감으로 두 동지가 올라갔고 밑에서 바라보는 저나 우리 동료들도 그런 마음으로 버텨왔던 것 같아요."

— 두 동지가 굴뚝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기까지, 땅 위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당시의 심경은 어떠셨나요?
"지켜보는 심정이란 아까 그런 마음으로 있었는데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어요. 그 곳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 또 굴뚝 위로 올라가는 주가 이 지역 최대 한파였어요. 최소한의 보온도 제대로 안 되는 조건 속에서 올라간 초기부터의 몇 일간은 이것 때문에 싸우기 시작했죠.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만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먼저 확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근데 초창기 딱 굴뚝에 오르고 나서 굴뚝 보이는 곳에 천막을 치는 것조차도 긴급행정대책회의라고 하면서 경찰과 시청이 동시에 동원되어서 엄청나게 저희를 탄압했거든요. 그 가운데 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어요. 몸으로 부딪치고, 저항하고 그러면서 자기 공간을 확보하고 위의 동지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이게 매우 중요했죠. 왜냐면 땅 위에서 느끼는 추위와 굴뚝 70m 위에서 느끼는 추위는 전혀 다르거든요.

또 여러 가지 연기문제나 좁은 공간이나 환경적으로 보면 장기간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안되기 때문에 올라간 동지들만큼이나 정말 절박함으로 굴뚝농성 돌입한 날부터 저희도 24시간 농성체제로 운영했어요. 알릴 수 있는 것 최대한 알려내고. 빨리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이래저래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법원 승소하고 바로 다음 주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 했을 때보다 이 두 동지가 올라가서 한 달이 지난 후에 굴뚝 앞에서 긴급집결 했을 때 조합원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왔어요. 횟수로 7년 만에 조합원 결의대회도 했고. 그만큼 두 동지가 걸었던 희망과 기대만큼 전국에 생계 때문에 흩어져있던 조합원들이 모이게 된 것 같아요. 굴뚝 위로 올라간 두 동지의 외로움과 고독과 고통이 다른 동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 올해 초, 쌍용자동차의 대주주인 마힌드라 회장과 직접 만나 대화하셨는데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나요? 그리고 그 뒤로 뭔가 달라진 것이 있나요?
"1월 13일이 신차 티볼리 출시 일이었고 1월 14일날 평택공장 방문일정에 섞여서 아침에 만났어요. 인상은 참 부드럽고 좋았어요. 그룹의 오너, 그것도 회장이라고 할 정도면 권위적일 수도 있는데 그런 거 느끼지 못했어요. 정말 편안한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마힌드라 회장이 15분에서 20분정도 본인얘기를 했어요. 기업경영인으로서 기업이윤창출을 전제로 하는 얘기를 풀었고, 이미 한국과 이곳 공장에 오기 전에 굴뚝농성과 해고자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얘기를 먼저 시작했어요. 우리는 마힌드라의 기업목표나 가치를 보더라도 대립과 갈등보다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측면에서 한국 경영진과 충분히 이야기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런 노력들을 최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얘기했죠.

이미 우리도 2014년도 한 해에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돌아갈 공장 안의 동료들과 화해하는 일과 치유하는 일을 하고 있고, 긴 시간의 투쟁생활이 해고자들에겐 엄청난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었어요. 파산, 가정파괴, 죽음을 수년 동안 지켜봐 왔고 이젠 끝을 냈으면 좋겠다고 전달했어요. 짧은 시간이어서 많은 얘기를 주고받진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 자리가 3자 대표의 만남이라는 것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실무교섭까지 이어지는 계기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수많은 죽음과 아픔이 있었지만••• 조급해하기보단 차분하게 대화로 풀어 갈 생각"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맞은편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무실 앞에 걸린 희망 자물쇠들 ‘3.14 쌍차 희망행동’ 당시 쌍용차 문제해결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시민들과 해고자들이 메모와 함께 공장 주변에 희망 자물쇠를 걸어놓은 모습이다. ⓒ 사람들


—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섭의 목적은 무엇이며 현재까지의 경과는 어떠한가요?
"1월 21일날 3자대표가 만났어요. 저하고 김규한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위원장하고 이유일 사장이 만나서 얘기를 했죠. 그래서 결론은 해고자복직, 손배가압류, 회사정상화, 26명의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지원대책. 이 네 가지를 의제로 해서 실무교섭을 하기로 하고 1월 29일부터 실무교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첫 실무교섭에선 노-노-사 교섭으로 하되 간사1인을 포함한 3명을 인원으로 확정하고 주기를 매주 목요일 2시에 하는 것으로 해서 지금까지 매주 거치면서 교섭을 하고 있어요. 이번 교섭의 목적은 쌍용차 문제에 대한 해결이죠. 아까 그 네 가지에 대한 목적을 걸고 해결을 하려는 것이고요.

현재까지 경과에 대해서는 사실은 뭐 조금씩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좁혀나가는 과정을 갖고 있지만 확연한 결론은 없는 상태입니다. 6년이란 시간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데 어쨌든 우리에겐 긴 시간이었잖아요. 실무교섭이 이런 시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야 '빨리 회사가 결단해라'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회사는 회사 나름대로 이런저런 얘기들이 있고요. 6년 동안 서로 언론, 소식지를 통해서 입장을 전달했더라면 이제는 공식석상에서 서로 입장을 확인하고 서로의 입장을 좁혀나가는 과정으로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는 있는데 이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 쌍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데 있어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힘든 건 시간과의 싸움 아니겠나 싶어요. 하루하루의 삶이, 해고 1년과 2년과 3년과 4년과•••. (웃음) 사실 이렇게 긴 싸움을 이어온다는 게 쉽지 않아요. 가장 힘든 건 하루하루 시간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이잖아요. 싸우는 순간순간 발걸음을 걸어간다는 희망이 싸우는 동지들한테는 필요한데 때론 그렇지 않잖아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던가. 사실 우리는 죽음의 문제가 크게 다가왔고 6년 동안 안 해본 투쟁이 없잖아요. 수많은 역경과 노력, 고통, 아픔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투쟁 사업장처럼 우리가 고립되거나 우리의 문제가 잊혀지거나 했다면 고민의 깊이는 더 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쌍차 투쟁은 워낙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과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그것이 우리한텐 큰 힘이 되는 거죠. 갑갑하고 심경이 복잡해도 그래도 지부가 계속 6년 동안 이탈 없이 이어져왔고, 이번 농성 끝나고도 3명이 간부로 합류했어요. 다시 한번 해보자는 거죠. 지금은 하도 익숙해져서 다른 건 특별하게 힘들다고 생각되는 게 없는데, 다만 아이들이 커가고 아빠와 남편의 자리에 빈 공간이 커져가는 것은 본인이 갈등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죠. 경제적 어려움 이런 건 말할 것도 없고. 그것 때문에 작은 문제와 마찰들이 있는 건 당연하고. 아이들의 중요한 시기에 같이 못해준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이런 일상에서 주어지는 것에 대해 미안함이 있고 그런 것이죠. 나머지 투쟁이야 이미 결심하고 결의하고 해왔기 때문에, 또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동지들이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습니다.

— 장기간 투쟁하고 있는 만큼 따른 노조 내부에서 충돌과 마찰이 없나요?
"저희가 '뭐 하나 하자' 그러면 이견이 좀 있긴 하지만 막상 하나 결정되면 전체가 잘해요. 여타 사업장들 보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 안에 모든 것이 반 토막 나거나 와해되거나 하는데, 아직까지는 우리가 09년도에 공장 밖으로 밀려나오고 나서도 지금까지 사망자 외에는 누구도 여기서 이탈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한편으로는 상당히 힘이 되죠. 저희는 큰 거 가지고 싸우지 않아요. 먹는 거 가지고 싸웁니다. (웃음) 소소한 거요." 

— 투쟁 중에 병마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26명에 이릅니다. 동지들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것들을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저희 투쟁이 사회적으로 쟁점되었던 계기가 사실 대규모 정리해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후에 발생되었던 이 죽음의 문제가 상당히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어요.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2011년도 겨울엔 공장 희망텐트를 했어요. 근데 그 이후에 12년도 초에 이윤형 동지의 22번째 죽음이 있었는데 첫 정리해고 대상자였어요. 그 동안엔 희망퇴직자나 가족이었는데 이 친구는 정리해고자였었고•••. 이 때 느꼈던 마음은 망연자실 이외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요.

09년도에 제가 조직쟁의실장을 했는데 모든 파업을 진두지휘 하는 거거든요. 옥쇄파업 중에 저 친구와는 파업이 끝나면 소주 마시며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방금 얘기한 이윤형이란 친군가 그 중 한 명이에요. 이 친구랑 11년도에 통화를 많이 했었어요. 근데 그때마다 힘들다고 했었고•••. 평택에서 일자리를 못 찾아서 결국 인천까지 가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했는데 이 친구가 술만 마시면 쌍용차 얘기를 좀 했나 봐요. 그럼 주변에서 '너는 빨갱이다' 이런 소리까지 듣고•••. 그럴 때면 새벽에 전화 와서 '이런 소리 들어봤냐, 어떻게 대응했냐'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문제였지만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힘들어했어요.
그 당시 심리치유공간인 '와락'이 만들어지면서 그 친구한테 내려오라고 얘길 했었어요. 이 친구가 결과적으로 한 번은 왔었어요. 12년도 초에 가까운 곳에 면접을 보러 왔는데 면접이 잘 되어서 평택에서 일하게 되면 자주 들르겠다고 얘길 했었는데••• 일주일 후에 잘 안 됐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이후에 사망소식을 듣게 됐죠. 망연자실했고 믿을 수 없었어요. 죽음 앞에서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어요.

또 26명의 사람들을 잘 알고 모름을 떠나서 정리해고라는 게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고 때론 분노도 같이 생기죠. 치유하고 화해한다곤 하지만 이 모든 죽음은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은 정리해고가 아닌가 해요. 사실 질병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마찬가지죠. 일상적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사회적 낙인과 억압 속에서 살지 않았다고 한다면•••. 쌍차 다녔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무슨 큰 죄인인양 취급을 받거든요. 저희는 이력서의 주홍글씨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힘든 상황에서 찾는 게 술, 담배고 그러다 보면 건강 망가지고 하는 거죠."

— 수많은 죽음들과 아픔 속에서도 근 6년간 쉴새 없이 투쟁과 운동을 이어오셨어요. 고공농성을 해제한 현 시점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한 노조의 계획이나 다짐을 말씀해주세요.
"아까 얘기했듯이 저희는 이 긴 터널 끝에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계속적으로 이어나갈 것이고요, 대화와 교섭 외의 또 다른 것들을 준비 중이에요. 그 동안 굴뚝농성과 교섭을 중심으로 해서 지난 12부터 3월까지 유지해왔는데 이제 굴뚝농성도 해제되었고 이제 여기에 맞는 준비를 차분하게 하고자 해요. 이 굴뚝농성 중에는 교섭이 때로 급해질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굴뚝 위 동지들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면 느슨하게 할 수가 없게 되요. 굴뚝농성이 해제되었으니 지금은 교섭의 문제를 조급하게 하진 않을 거고요 그래도 시간을 당기기 위해 차분하게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계속 연대집회 다니고 금요일, 토요일은 1박2일 스타케미칼 동지들과 쌍차 동지들과 다른 프로그램 없이 족구도 하고 음식도 거기서 같이 해 먹고 하면서 서로 힘 다지기 하는 활동을 할 예정이고요, 그 이후엔 이후 투쟁 방향 관련해서 집중 토론을 하고 이달 중순엔 수련회 기획하고 있고요. 수련회에서 확정된 투쟁계획 가지고 조합원들과 함께 각자의 역할을 할 생각입니다. 저희는 져본다는 걸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포기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겁니다."

덧붙이는 글 내용이 많아서 그런건지... 첫번째 사진 밑으로 드래그가 안됩니다... 익스플로러에서도 크롬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해봤는데 도저히 안되네요... 아래 추가사항에 대해 편집부에서 수정 부탁드립니다.
1) 두번째, 세번째 사진 위에 소제목 볼드처리 부탁드립니다.
2) 질문들은 글자색을 파란색으로 바꿔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3) 두번째 사진 바로 밑 질문에 참고기사가 있는데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41213024600061&query=%EC%8C%8D%EC%9A%A9%20%EB%86%8D%EC%84%B1%20%EC%8B%9C%EC%9E%91 로 링크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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