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1970,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詩가 되지 못한 필름을 위한 진혼곡

검토 완료

이형석(hyulran)등록 2015.02.05 19:49
강남 1970,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詩가 되지 못한 필름을 위한 진혼곡

우리 문단에서 글을 쓰다가 감독으로 데뷔한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소설가였고 다른 한 명은 시인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 둘 다 현역이었을 때 제법 괜찮은 작품을 선보였는데 소설가에서 전향한 감독은 몇 해 전 외국의 유명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 흥행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시인이었던 자의 작품은 수상 보다는 오히려 흥행에서 앞서 나갔다. 성공 요인 중 하나가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주목받는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들이 출연했기 때문이다. 짐작하다 시피 한 사람은 이창동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유하다. 드래곤은 아니지만 뱀도 아닌 그래서 대박은 아니지만 쪽박은 아닌 중박 정도의 지위와 지명도를 갖고 있기에 그들이 충무로라는, 화류계의 정점에서 아직까지 버티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레전드 급의 이무기가 실은 승천하는 용보다 더 많은 것을 거느리고 있다면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궁금하면 바람 부는 날, 압구정동에 가 보기를 바란다. 물론 그 전에 유하의 시집부터 읽기를 권한다.


어느 날 그가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노란색 쫄쫄이 옷을 입은 동양의 리틀맨이 쇠사슬 달린 곤봉으로 전세계 남자의 우상으로 떠오른 것처럼 그는 최민수를 내세운 데뷔작으로 신고를 하더니 감우성과 엄정화가 주연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평단과 관객의 관심을 끌다가 마침내 세 번 째 작품에서 그야말로 떴다. 핫 식스팩의 복근을 내세워 혀 짧은 발음의 콤플렉스를 뒤덮는데 성공한 권상우가 주연한 <말죽거리 잔혹사>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헐리웃 B급 영화를 번역한 듯한 이 Dark History는 장차 감독으로서의 유하의 미래에 청신호를 넘어서는 레드카펫을 깔아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그 뒤를 이어 조인성을 내세운 <비열한 거리>가 탄생했다. 이번에 태어난 7번째 작품, <강남 1970>을 찍기 전의 작품인 <쌍화점>과 <하울링>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모든 사람에게는 잊고 싶은 흑역사가 있는 법이니까.


강남 1970 강남 1970 ⓒ 영화사


<하울링>의 흥행 참패 이후 와신상담을 통해 권토중래 했다길래, 이 작품이 소위 거리 3부작의 완결편이라기에 부푼 기대를 안고 스크린을 주시했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이 내게는 고역이었다. 내 기억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유년 시절에 목격한 넝마주이. 하지만 스크린 속의 두 넝마주이는 영화배우가 울고 갈 정도의 마스크와 기럭지의 소유자였다. 대체 이게 뭔 지랄인지. 하긴 작고 못 생기고 뚱뚱한 배우를 보기 위해서 극장을 찾는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리얼리티가 현저히 떨어졌다. 차라리 환타지였다. 후광 효과를 음미하는 넝마주이 코스프레는 건달의 세계로 뛰어든 용기와 종대가 피를 부르는 장면에서 일종의 뮤직비디오로 변신하기 까지 한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라이벌을 제거한 두 남자가 흠뻑 젖은 상태로 내달리며 만나는 장면은 환타지가 분명했다. 감정 이입은 커녕 적극적으로 나를 스크린 밖으로 밀어내는 물과 기름 같은 그 조합에서 드라마라도 충실하게 따라가자는 생각은 그것조차도 끝내 욕심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시인이 늙으면 이렇게 되는 걸까? Time is Money가 맞다면 나는 얼결에 강도를 당한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지만 추하게 늙는 것은 죄가 맞는 것 같다. 그건 다른 의미에서 형벌이다. <국제시장>에서 아버지역을 맡아 흥남부두에서 증발해버린 정진영이 끝끝내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 넘치게 호흡을 같이해준 것은 좋았지만 그것은 차라리 악몽의 유인책 같은 환영이었다. 마침내 그로테스크까지 한 프레임의 분절(分折)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내 호흡과 시선에 부정맥이 찾아왔다. 영육이 분리되는 듯한, 요즘 주류 언론의 이면에서 유행하는 표현대로 유체이탈과 같은 증세가 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나를 자주 '밖'으로 호출했다. 문득 김승옥이 생각난 것은 <서울, 1964년의 겨울>이라는 단편소설 제목 때문이었다. 내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사로잡은 몇 개 안 되는 멋진 제목 가운데 거의 최고였던, 그냥 듣는 것 혹은 읽는 것만으로도 나를 사로잡았던 그 멋진 제목을 복기(復記)한 것은 일종의 비상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 1964년의 겨울>은 어느새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나를 데려 갔다. 거의 40년에 육박하는 그 세월의 간극은 아마 워프(Warp:공간을 일그러뜨려 4차원으로 두점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킴으로써, 광속보다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가상의 방법)에 의해서 가능했으리라.

강남 1970 강남 1970 ⓒ 영화사


장신에 독신인 남자, 시를 쓰다 필름을 갖고 노는 남자. 일류배우가 아니면 작업하지 않는 이 남자. 우리나라에서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평론가라는 불문(佛文)학자 김현이 살아있을 때 문학과 지성사에서 시집을 내며 직접 그의 평론이 시집 뒤에 실리는 영광을 누렸던 남자. 단 두 번째 시집 출간만으로 한때나마 거의 모든 영광을 누렸던 남자. 내게 키치(Kitsch)의 어감과 그 존재를 알려준 남자. 그렇지만…. <강남 1970>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Time is Money가 맞다면 그래서 내가 얼결에 당한 강도를 독자들도 굳이 경험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라고 잠시 교만을 떨어본다. 영화 내내 주기적으로 등장한 폭력신을 떠나서 예전 그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파워 섹스씬이 불편했던 것은 그의 상상력이 소위 '뽕꾸라'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용기로 분한 김래원이 양기택 몰래 정을 통하는 보스의 여자 주소정을 보면서 관객들은 논도 아니고 겨우 밭이었을 70년 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공간에서 청담동 스타일의 강남미인도를 구경하는 타임머신 체험을 할 수가 있다. 이 아니 놀라운가? 그 외에도 깜놀할만한 것들은 계속 감자밭의 감자처럼 연달아 튀어나온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몇 년의 시차를 아주 가볍게 무시하고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워프와 타임머신이 혼란에 빠질 것만 같다. 대체 왜 이런 거니? 특히 최진호가 맡은 박승구역의 콧수염 아저씨!!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팜므파탈 비슷한 김지수와 종대역을 맡아 열연한 연하의 꽃미남 이민호 사이의 타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썸은 유하의 나쁜 연출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 둘 사이의 불꽃은 영화 후반부를 다르게 장식할 수도 있는 발화물질이었기에 대단히 아쉽다. 대신 종대에게서 용기의 가슴을 차지한 소정의 역할을 한 존재는 정진영의 딸 선혜로 나오는-아이돌 AOA 출신의-김설현이다. 마음으로도 품을 수 없는 은인의 딸이기에 그녀의 행복을 순수하게 빌어줄 수 밖에 없는 순정은 갸륵한데 이것 조차도 참 낡고 때 묻은 신파의 옷을 벗어던지지 못해서 난감하기 그지 없다.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도박중독자에다 여자를 손찌검까지 하다니, 이만하면 제대로 다 갖추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길수역을 맡은 논두렁 조폭 정진영이 개과천선하고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것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셰레이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옷을 바꿔입을 수는 있어도 본래 마음까지 바꾸지는 못하는 법. 거리 3부작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여성이 조연으로서 소품처리 된다는 것이다. 장르가 액션이라서, 소재가 폭력이어서가 아니다.


강남 1970 시사회에서 인사하는 감독과 주연배우들 ⓒ 영화사


유하의 작품에 등장하는 음악이 2부작인 <비열한 거리>에서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1세계가 아닌 제 3세계의 들러리 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면 폭력>섹스, 이 부등호는 완고하다. 그는 끝내 울타리를 넘지 않았다. 타갈로그어로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Anak을 배경음악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 중심이 아닌 주변을 인용하거나 빗대어 기생할 수 밖에 없는 약자들이 억압과 폭압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위의 부등호라는 것은 그의 영감을 자극한 뇌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부름에 응한 아들의 진창으로의 회귀로 막을 내린 3부작. 그래서 잔혹한 어둠의 내면을 그대로 스크린에 방출 혹은 복사한 감독에게 시는 어쩌면 영화를 위한 기회비용이었는지도 모른다. 1초에 필요한 24개의 프레임을 위해서 24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한글이 필요조건 이상으로 자아를 헌신해야 하는 불평등에서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이제 겨우 50을 조금 넘겼을 뿐인데 그 나이가 샤방샤방한 창작에 걸림돌이 되는 거라면 너무 슬픈 일이다. 그의 시가 멈춘 것은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강남 1970 강남 1970에서 열연을 펼친 유승목 ⓒ 영화사


악질의 제왕, 서태곤 역을 맡은 유승목이라는 배우를 발견한 것은 이 영화의 최대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해무>도 있고 <살인의 추억>도 있으니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유하 감독과는 단편 <1호선>의 주연을 맡은 후 장편 데뷔작까지 함께 하게 된 끈끈한 사이라고 하는데 박수쳐 주고 싶다. 무명에 가까운 배우로서 보낸 지난 시절이 알게 모르게 모진 세월이었을 텐데, 그에게는 반듯한 주연이 복권이나 마찬가지인 일종의 강남이 아니겠는가? 오랜 시간의 인내와 끈기의 투자가 투기가 되면 이처럼 뜨는 것이다. 콧수염 아저씨로 등장하는 권력의 시녀, 박승구역의 최진호와 함께 영화를 잘 받쳐준 열연에 평단과 언론도 호의적이다. 제비와 건달 사이를 분주히 오간 박창배 역의 한재영도 빼놓을 수가 없다. 그 외에도 육탄(肉彈) 공양을 한 주소정역의 이연두도 예의상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강남 1970>에는 많은 무명배우들(?)이 나오는데 이렇듯 무명급 배우가 떼를 지어 제 각기 굵은 역할을 소화하는 영화도 흔치가 않다. 이민호와 김래원, 투 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그것은 120% 성공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황석영의 <강남몽>을 떠올린 것은 적절함을 떠나서 필연적이었다. 원작을 <강남몽>이라 해도 이상스럽지 않을 정도의 유사성이 있는 소설과 영화 <강남 1970>, 어쩌면 출판사 측에서 노이즈 마케팅을 위한 문제제기를 의도적으로라도 할 법 한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조용하게라도 묻어갈 수 있는 흐름을 타기에는 틀린 것 같다. 사재기를 하다 걸려서 언론에 몇 번 얻어맞고 작가가 판금 운운하더니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관객들은 지금의 영동이 영등포의 동쪽에 있기에 영동이라 불렸다는 사실과 같은 비하인드 히스토리를 접하면서 뒷목 땡기는 쏠쏠한 재미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의 압구정동이 배밭이었다면 대체 누가 그걸 믿을 것인가?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강남, 거대한 욕망의 용광로였던 한강 이남 그래서 지금 강남 곳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실감 대신 아마도 신비를 느낄 것이다. 우월한 마스크와 기럭지의 넝마주이를 보면서 비현실적인 환타지가 찾아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남 1970 강남 1970에서 열연을 펼친 이연두 ⓒ 영화사


<강남 1970>은 감동을 받기에는 환타지가 너무 강하다. 공식이 도식화 되기는 하지만 형식이 되면 격식이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유하, 24년 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갔던 그 남자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서울에는 이미 흙이 없는데…. 거리 3부작을 관통하는 추억의 팝송으로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프레디 아길라가 부른 아낙(Anak)이, 詩가 되지 못한 필름을 위한 진혼곡으로 들리는 것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무허가 판자집에서 겨울에 권투를 하는 두 청년의 푸드웍 때문에 바닥의 백열전구가 깨지면서 찾아온 어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거기에서 만큼은 나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처연한 뭉클함이 아니었을까?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가난한 고아 형제,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젖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으랴? 거지와 넝마주이를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 가슴에 묻기에는 살짝만 들췄을 뿐인데 우리의 과거가 너무 많이 아프다. 진심으로 대박은 아니더라도 중박이라도 되기를, 레전드 급의 이무기로 승천하는 용보다 더 많은 것을 거느리는 영화로 흥행에 꼭 성공하기를 바라며 리뷰와 평론 사이의 주제 넘은 잡설(雜說)을 내려놓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후아이엠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