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읽다가 몸살 나겠다!

- 김희선의 <라면의 황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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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용(seyoh)등록 2015.01.30 18:04
1. 이 책 읽다가 몸살 나겠다!

책을 읽으면서 이번 경우처럼 몸살을 앓았던 적이 없었다. 몸살이라니, 책을 읽으면서 웬 몸살? 다름이 아니라,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을 읽으면서, 읽다가 멈추고 그 소설들이 기초하고 있는 배경들, 등장인물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는 이야기다. 사실적인 사건에 덧붙여져 교묘하게 진화하는 이야기. 허구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를 알고 싶어지는 몸살 말이다. 그런 몸살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앓았다.

(참, 여기에서 '몸살(이) 나다'는 말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못 견디다'라는 의미의 관형구이니, 오해 없기를!)

그래서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읽기를 잠간 멈추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바로 베르베르를 떠올렸다. 그게 바로 베르베르의 경지가 아닌가? 이런 몸살은 첫 장부터 시작한다. '정말 서울시장 집무실에 깔려 있던 헤리트 카페트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 <개들의 사생활>에서는 어떤가? 자료를 검색해 보니, 프리온과 스탠리 푸르시너(191쪽)는 실재하는 물질이고 인물이었다.

< 프리온(prion)은 1982년 미국 생리학자 스탠리 프루시너가 `단백질성'(proteinacious)과 `감염성'(intectious)을 조합해서 `감염성 단백질'이라는 뜻으로 만든 용어다. 프루시너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정도로 획기적인 특성을 가진 프리온이 우리에게는 고약한 광우병 발병 요인으로만 인식이 돼버렸다.>

(인터넷 자료 중 일부)

그리고 그것에 기반하여 이어지는 스토리, 과연 어디까지가 소설? 그런 흡입요소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느 멋진 날>에서의 '샤론 전 총리, 자극과 소리에 반응했다'(218쪽)는 어떤가? 그건 사실이다. 그러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실? 아니다. 그렇게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2. 기억투쟁 - 당신의 기억은 안녕하십니까?

<라면의 황제>, 이것은 기억의 소설이다. 우리 사람이 기억이 덧없음을 그려낸 책이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일반화의 오류에 속아 넘어가는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한 비논리적 프로파간다에 바보처럼 속아 넘어가는가를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냉철하게 비판한 것이다.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소득이 감소한다'(80쪽)는 본말전도식의 결론에 소설 속의 사람들은 깜박 속아 넘어가지 않았는가?

그러니 소설 밖에서도, 급기야는 현대 사회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의 주범으로 라면이 몰리듯이(80쪽) 우리도 누군가를 (전혀 본질과는 관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몰아) 마녀사냥하지 않았던가?

그러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세상의 모든 영수증'(94쪽)을 간직한 박모 노인처럼 그렇게 영수증이라도 모아야 하나?

아니면 <교육의 탄생>에 등장하는 것처럼 오길훈이란 일개인의 우연한 자료 발견(46쪽)에 기대어야 하나?

이 책은 그런 오류에 빠져 애먼 사람을 잡아버리는 그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경고이며,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각하게 그러한 풍조에 대항하여 '기억투쟁'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3. 개념있는 주제의식

<교육의 탄생>과 <어느 멋진 날>에서는 저자가 얼마만큼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비평가인 백지연은 '개념있는 주제의식'(316쪽)이라 부른다.

먼저 저자는 그 것을 소설화하기 위해 '음모론'이란 도구를 꺼내든다.

옛날에 아주 옛날에 모든 학생들이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을 저자는 텔레파시 신호를 보내는 진언으로 음모론의 얼개를 짠다.

그렇게 소리내어 - 마치 진언처럼 - 외우면 그것이 우리 뇌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헌장을 열심히 외우면 거기에서 생긴 소리의 파동이 우리 뇌에 비가역적이고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67쪽)

그런 인과관계를 감쪽같이 만들기 위하여 저자는 천재 '최두식'을 등장시키고, 또한 소련계 뇌신경학자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를 등장시킨다.

그런 진언은 <개의 사생활>에는 이렇게 (엉뚱하게) 진화하기도 한다.

'개를 인간보다 더 사랑하라는 궁극의 신호' (198쪽)

<가장 진화된 신호, 프리온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고 나는 이 신호들이 이미 개들에게서 발산되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198쪽)

그러나 그의 주제의식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어느 멋진 날>이다.

구로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파키스탄인, 물론 그 신상정보는 여권상의 신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기시감을 느끼게 되며, 그래서 이야기는 저자의 상상력에 힘입어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이스라엘의 전 총리,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샤론 총리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전쟁의 참화를 알려주려 한다. 무의식에 침투한다니? 그게 바로 <교육의 탄생>에 등장하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물론 이번에도 그는 본명으로 행세하지 않는다.

<이븐 알 하둔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전공에 이슬람 신비주의를 결합하여 사람의 무의식에 침투하는 방법을 만들어냈고, 그걸 테러에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사악한 인간이다.> (222쪽)

이븐 알 하둔이 바로 최두식에게 무의식에 관한 지식을 알려준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이다.

그를 매개로 하여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은 시공을 건너 서울에서도 일어난다. 그것을 암시하는 말이 바로 '기시감'이다.

<기시감 :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나 처음 본 인물, 광경들이 이전에 언젠가 경험하였거나 보앗던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246쪽)

<어느 멋진 날>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피를 동반한 사건은 그 장소를 서울로 옮겨 일어난다. 기시감이 서울과 이스라엘 사이, 그 천리길을 연결해주는 열쇠다. 그래서 이스라엘, 또는 팔레스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단순히 '거기에서만, 그 때에만'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4. 저자는? 상상력의 여왕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그런 상상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까? 아마 이런 기록은 저자에게 해당하는 말일게다.

<'소설'이라는 말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그는 속으로 그 낯설고도 생소한 단어를 발음해보며 대답했다. "난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길 공책에 적었을 뿐인데요. 그냥, 이런 세상도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예요.>(225쪽)

그런 상상력이 독자인 나를 즐겁게 한다. 이 세상 일들은,그러고 보면 연관되지 않은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던가? 그런 연관이 비록 지금 보기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어보인다 할지라도 속으로는 마치 용암처럼 지구 저 밑에서 서로 구렁이처럼 서로 얽혀 있을지 누가 아는가? 김희선의 이 소설집은 바로 그러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이런 표현으로 그 얽혀있음을 묘사한다.

<그건, 우리 모두가 세상의 기저에선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야.>(242쪽)

덧붙여, 저자는 '어떤 사실과 사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데엔, 천재적인 직관이 필요하다'(189쪽) 했는데,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저자는 그 연관성을 찾아내는데 천재적인 상상력으로 연관성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보라! 미우주국 나사에서 일하던 소련계 레오니드 몰로디노프가 이스라엘 샤론 총리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장미꽃 한송이를 흔든 그 의사(232, 238쪽)인줄 누가 알겠는가? 저자는 그렇게 우리 허를 찌르는 그럴싸한 상상력으로 베르베르의 경지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5. '비틀기'의 여왕

더하여 그는 유쾌하게 비틀기도 잘한다. 비틀고 꼬집어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김난도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이렇게 비틀어 놓는다.

<그러니 여러분, 젊은 시절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한국의 속담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뭐라더라, 거 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명언도 있지 않습니까?> (271쪽)

작은 마을에 대평마트, 우리 보기에는 일상화된 건물이며 사간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신기하게 보인다. 누구 눈에?

<"얼마 전 새로 생긴 쇼핑몰이죠. 이 나라에선 저런 곳을 대형마트라 하더군요.

"신기하군요. 이렇게 작은 마을에 저렇게 큰 쇼핑몰이라니요">( 293쪽)

외국인에게 '이렇게 작은 마을에 저렇게 큰 쇼핑몰'은 신기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신기하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말일까?

6. 한국의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그래서 <라면의 황제>를 읽고난 나는, 정색하고 말한다. 베르베르의 상상력에 열광한 게 분명 한국의 독자들이라면, 이 책에도 열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독서계에도 사대주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실과 허구를 그토록 맛깔스럽게 요리하여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베르베르에 필적할만한 글인데, 왜 외국인이 쓴 것이라면 그토록 오매불망하고 한국인이 쓴 책은 백안시하는가? 그런 태도는 바람직한 독서인의 자세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의 구독 내지 판매 여부가 우리 문화계가 여전히 문화적 사대주의에 젖어있는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평가를 받아 마땅한 책이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나의 불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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