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이 깨질 뻔 한 사연

사소한 과학이야기 <힘의 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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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진(sweetshim)등록 2014.12.19 13:58
고등학교 생물시간이었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이 인체구조를 설명하고 있었다. 몹시 지루했다. 이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선생님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생명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과 폐가 하필이면 얇은 갈비뼈로 둘러싸여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 나는, 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교실. 선생님의 입에선 갈비뼈 대신 난 데 없이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 이야기가 나왔다.

"바야흐로 20여 년 전의 이야기야. 새로 지은 박물관으로 에밀레종을 옮길 때였어.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거운 종이 달려 있었으니 이제 종 고리를 바꿀 때가 됐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최고로 강하다는 강철로 종 고리를 새로 만들었지. 통일신라시대보다야 아무래도 기술이 더 발달했을 테니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보다 몇 톤이나 무거운 쇳덩어리를 매달아 시험했지.

그런데 그 종 고리가 글쎄 일주일 만에 휘기 시작한 거야. 만일 처음부터 종을 매달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떨어져 깨지고 말았겠지. '아차, 큰일 났구나' 싶어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했어. 문제는 종 머리에 난 구멍이었어. 종에 난 구멍에 쇠막대기를 끼워 종 고리와 연결해야하는데, 종에 난 구멍이 너무 작았던 거야.

종 무게를 감당하려면 쇠막대기가 굵어야하고, 그러면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 아무리 해봐도 답이 안 나왔던 거지. 그래서 원래 달려 있던 쇠막대기를 다시 꼼꼼히 살펴보니 이건 하나도 휘어지지 않았거든? 다들 놀라고 말았지. 알고 보니 이 쇠막대기는 단순히 금속을 녹여서 굳힌 게 아니었던 거야. 쇳덩어리를 얇게 편 다음 그걸 다시 둥글게 말아 만들었던 거지"

나도 모르게 "우와" 하는 탄성이 나왔다.

"얇은 금속판을 겹쳐 만든 쇠막대기가 강한 이유는 그 금속판 하나하나가 종 무게를 나눠서 감당하기 때문이야. 무게가 분산되는 거지. 하지만 통으로 된 쇠막대기는 같은 두께여도 오로지 혼자 그 무게를 감당해야하니 휘어지고 부러질 수밖에 없어"

교실 안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갈비뼈도 마찬가지야. 얇은 뼈들이 모여서 충격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지. 만일 갈비뼈가 한 덩어리로 돼 있다면 쉽게 부서져서 장기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을 거야. 이런 걸 힘의 분산이라고 해. 인체가 이렇게 신비로워. 너희 몸이 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어느새 수업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에밀레종은 어떻게 됐을까? 아이들이 웅성거리자, 선생님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현재 기술로는 도저히 그 쇠막대기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결국 오래된 쇠막대기를 다시 사용하기로 했지. 어떻게 그 옛날 사람들이 그 원리를 알고 만들었는지…"

얼마 전 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20년 전 그 수업시간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여러 자료를 살핀 결과,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작은 것 여러 개가 모여 무거운 것을 지탱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원리가 내 갈비뼈에도 숨어 있다니. 나는 그 어린 날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특별할 것 없는 지금의 삶을 떠올렸다. 내 작은 삶도 세상을 떠받치는 하나의 힘이 될 수 있을까….

얼마 후면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몇몇 커다란 힘이 아닌 무수히 나뉜 작은 삶들로 이뤄 있음을 종소리가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그 종이 에밀레종은 아니지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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