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회담>, 손에 손잡고 나가는 평화로운 한국촌을 그려 보새!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우리’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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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관(minkwan)등록 2014.11.20 15:13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너', <비정상회담>의 엔딩 송은 미리 녹음된 음악도 아닌, 할 때마다 달라지는 육성으로 짜내는 전현무의 목소리로 대신한다. 그리고 이는 어떤 흥얼거림이며, <비정상회담>의 콘셉트인 동시에, 그 내용은 무엇보다 이 시대의 어떤 낌새다. 이 글은 <비정상회담>에서 말하는 '(비)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이다.

패널로 출연하는 11명의 외국인이 있다. 이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들 국적이 다 다르다는 게 하나의 공통점. 그들 모두 한국인이 아니며, 동시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외국 국적의 패널이라고 하는 게 조금 더 맞는 설명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국말은 우리가 듣기에 차라리 지역 방언에 가깝다고 할지언정 크게 불편함이 없이 전해진다. 유창한 한국어 구사에 한국에 대한 화두를 능수능란하게 꺼내는 이들은 그 친근함에서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을 반추해 보게끔 하는 일면 역시 갖고 있다. 곧 '… 정상 같은 너'는 이들의 다른 이름이며, 한국말을 잘 못하고 한국에 대해 모르는, 그냥 보통의 외국인이 아니라(이들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한국말을 쓰고 한국이라는 사회에 적응한, 소위 타자성이 깎여 나가고 소멸한, 이들만이 '정상'에 가까운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저마다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이룬, 지구촌의 한 중심, 이른바 'K-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며, 일종의 만국 공통어로서의 한국어로 이들의 의견을 동조하고 한국 사회를 비교적 객관화시켜, 곧 어떤 우월한 자리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객관화는 사실상 주관적 시점의 은폐된 양상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정상' 같은 너를 통해 그들이 논하는 비정상(이 프로그램은 '비정상'을 논하는 회담을 콘셉트로 한다)의 의견에 부끄러워할 필요 없이 그것을 찬성/반대로 쉽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해진다. 어쩌면 그 원활한 수용의 과정은 그들을 우리 자신으로 믿고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MC 전현무가 또 다른 게스트가 출현할 때 외국인이 한국말을 왜 이리 잘하냐고 놀란다는 것처럼, 이들은 이미 한국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와 다른 모습, 그 차이를 인정하는 프로그램, 곧 외국인들에 대해 알기보다 우리와 닮은 이들이 거꾸로 우리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자아를 새삼 확인하고 다지는 데 초점이 맞춰진 프로그램인 것이다. 곧 비정상인 너(외국인, 나아가 한국 사회)를 정상인 것처럼 여기며 거기에 안주하는 것에 가깝다. 정상도 비정상도 아닌 제3의 무엇의 존재(이를 흔히 타자성을 지닌 존재, 곧 '타자'라고 한다)의 차이를 직시하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는, 또한 우리와 다른 비정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외국인을 그들의 시선에서 보며 정상에 대한 선입견을 허물기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흔들리는 지점에서 우리를 바라본다는 게 더 맞다.

전현무가 부르는 '비정상'이 패널들, 곧 한국인 같은 외국인의 존재를 호명한다면, 이 프로그램이 논하는 한국사회의 어떤 비정상의 면모에 대한 토론, 곧 회담의 주제에 대한 의견 개진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고, 비정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기보다, 그저 그 양 갈래의 의견들을 둥글게 모아내는 데 가깝다. 또한 이들이 삼는 한국이라는 안주거리는 우리가 이미 이들을 한국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서 외국인이 던지는 설익은 또는 비정한 비판의 개념이 아닌 그 현상의 편안한 소비의 일단이 된다.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곧 한국사회에 대한 주관적인 의견도 한국사회에 대한 매정한 비판도 아닌 각자의 의견들은 주제에 대한 이견들을 하나씩 듣고 토론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기보다 어느새 진정 없는 시장 통이 될 때 이는 목소리 큰 이가 승자라는 비합리주의적 한국 사회의 일면을 재현한다. 그리고 지구촌을 이루는 한국사회라는 그라운드를 그리며 '손에 손 잡고' 가는 집단적 한국인의 세레모니로 동지애를 확인한다.

가령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각 패널의 차이를 소멸시키고 그것을 비정상적으로 하나로 묶어내는지는 '타일러'(미국)와 '에네스'(터키) 두 패널의 존재로 명확해진다. 남성이 아닌 남자와 여성이 아닌 여자의 가정 내 성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되어야 하며 또 그것이 본질주의적이라는 식의 에네스의 의견은 일종의 문화적 토대가 미치는 사고의 한 단락에 다름 아니다. (결코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1900년경의 여성 선거권이 합법화되기 시작한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197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 이후의 사고(의 전환)를 따른다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걸 합리적으로 반박하는 이가 한국 사회에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는 것.

동성부부의 실태 조사를 통해, 가령 엄마가 아이를 돌봐야지만 아이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없다며 남성/여성의 주어진 성 역할에 대한 선입관을 반박하는(여기에는 좀 더 복잡하게는 성소수자에 대한 존중 역시 전제돼 있다) 타일러는 사실상 패널들 중 유일하게 어떤 근거를 갖고 말하며, 합리적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11명의 패널 중에서는 유별난 소수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둘에게는 사고 측면에서 일종의 한 세기 이상의 시차가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은 한국사회의 다수 혹은 소수를 대변하며(나에게는 타일러가 소수, 에네스가 다수로 보인다) 하나로 섞이고 만다. <비정상회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흩트리고 정상 같은 비정상과 비정상 같은 정상의 차이를 소멸시키는 데 가깝다.

당연히 남녀의 성 역할을 고정적으로 제시하는, 이른바 '정상 같은 비정상'의 의견은 비판되어야 하며, 여자는 자신의 일과 육아를 모두 잘해야지만 더 나은 존재라는, 박지윤이 게스트로 나왔을 때의 주제에 대해 타일러가 왜 여자는 둘 다 잘해야 하냐는 당연한 물음을 던지는, 그러나 그것이 흔하지 않은, '비정상 같은 정상'을 용인하는 결론을 가져가야 하는 게 맞다.

에네스가 자신의 문화적 토대를 신념으로 갖고 그것을 뚝심 있게 제시하는 동안 어쨌든 일관된 모습으로 그나마 합리주의적인 패널의 양상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장위안은 그저 자신의 의견이 맞는, 토론자로서는 결격인, 중국인이 아닌 (토론을 잘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공감을 받는다(인기나 화제의 축이 에네스에서 장위안으로 옮겨지는 현재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패널)들 사이에서 조소와 함께 일종의 동지애로 품어진다.

결과적으로 <비정상회담>는 토론을 지향하지만, 우리가 내지 못하는 의견들을 마구 꺼낼 수 있는 외국인들을 통해 조금 더 흥미진진한 K-사회를 확인하는 한편, 결코 이질적이지 않은 외국인들('한국 속의 세계')을 통해 '세계 속의 한국'을 확인하는 장이 된다. 그러니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너'는 이들 패널이 아니라, 결국 이들을 보고 낄낄거리는 우리 자신일 것이다.

전현무가 우스꽝스럽게 끄집어내는 이 노랫말처럼 비정상이 정상인 듯 보일 때 용인될 수 있는 너란 존재는, 결국 비정상에 대한 비판과 정상에 대한 용인이 무색해지는, 이른바 냉소적이고도 유희적인 관찰자적 시점을 취하는, 비참여적 한국 사회의 일단을 확인시키는 어떤 징후가 아닐까. 그리고 이는 더 논의/연구되어야 하겠지만, 리얼리티 관찰 프로그램('우리는 안전하게 우리와 닮은/같은 연예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공감한다!')이 증가 추세, 소위 대세가 되고 있는 한국 예능의 풍속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예술뉴스채널 아트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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