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었기에 공부를 포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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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배균(bact84)등록 2014.09.25 16:35
  
고등학생 중에는 공부를 이미 포기했거나, 포기하려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이 공부를 포기하기까지는 학생과 부모, 공교육, 사교육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데, 이 글에서는 학생의 심리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평균 이하의 성적표를 받은 이후부터 공부를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을 일반화하여 정리하였다.

1. 공부 못하면 인생 X 되는데 - 불안감

시험 성적이 자신과 부모의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하거나, 평균 또는 중간 이하이면 학생들은 실망을 넘어 불안감을 느낀다.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은 대학 입시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학생의 미래를 너무 쉽게 예단하는 한국사회에서 성적이 뒤쳐진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다.

2. 나는 해도 안 되나 - 무력감

학생들은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우수한 성적을 받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하지만 상대평가로 성적을 산출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평균 이하의 성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성적표를 수차례 계속 받으면 '나는 해도 안 되나?'라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3. 내가 열심히 안 해서 그래 - 자책감

무력감을 떨치기 위해 학생들은 '내가 열심히 안 해서 그래. 열심히만 하면 성적 금방 오를 수 있어. 앞으론 열심히 할 거야.'라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무력감이 떨쳐지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절망감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4. 공부하기 싫어 죽겠네

하지만 수차례 반복적으로 평균 이하의 성적표를 받으면 '공부하기 싫어 죽겠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력감과 자책감뿐만 아니라 수치심과 열등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공부에 흥미를 잃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뒤쳐질수록 점점 더 하기 싫어진다.
한편, 고등학교의 교육 내용은 학생 스스로 삶의 가치를 정립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즉,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부에 흥미를 갖기 어렵다.

5. 내일 하면 되지 뭐

하지만 학교를 떠나지 않는 한, 성적 경쟁은 계속 되므로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다고 학생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내일 열심히 하면 되지 뭐.'라며 오늘 해야 할 공부를 내일로 미루고, 자신을 위로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미루면서, 공부와 점점 멀어진다.

6.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돼

자녀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불안감이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돼.'라는 질책과 독려로 표출된다. 질책과 독려의 강도는 자녀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칠수록, 반복될수록, 부모 자신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클수록 강해진다. 그런데 자녀가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근거는 성적표이다. 즉, 결과를 보고 과정을 평가한다. 따라서 성적이 향상되더라도 평균 이하의 성적을 받으면, 학생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게 되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져서 자존감이 낮아진다.

7. 난 참 못난 인간이구나

부모의 질책과 독려 중에, '너는 게으르다.', '의지가 약하다.', '끈기가 없다.' 등의 자녀에 대한 비난이 포함되는 경우, 자녀들은 '난 참 못난 인간이구나'라며 자신을 비하하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부모의 비난은 다른 누구의 비난보다도 자녀들에게 깊이 내면화된다.

8. 아직 꿈을 찾지 못해서 그래

부모의 질책과 독려의 말을 들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 시험은 잘 봐야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는 드물다. 부모의 질책과 독려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성적이 나쁘다.'라는 자녀의 자책감을 강화시킨다.
자책감이 강화될수록 학생들은 '나는 아직 꿈을 찾지 못해서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거야.', '나는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쓸데도 없는 이런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등등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나름의 이유를 찾아 '자기합리화'를 통해 자책감을 줄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은 자책감을 조금 줄일 수는 있어도,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은 더 잃게 만든다.
한편, 학생들에게 제시되는 성공적인 삶은 명문대 졸업 후, 고소득 직업을 구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소위 수도권 대학 진학도 힘들다고 판단하는 학생들은 입시를 위한 학교 공부와 더 멀어진다.

9. 학원 다녀왔습니다

부모의 질책을 받지 않기 위해 학생들은 공부하는 '척'을 하기도 한다. 부모가 지켜볼 수 없는 학교, 학원, 독서실 등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기도 하고, 아예 PC방을 갔다가 학교의 야간자율학습이나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렇게 공부하는 척하고, 부모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속이면서 자녀들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부모의 질책이 두려워 부모를 계속 속이려 한다.

10. 수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네

학교 수업은 매시간 진도를 나가기 때문에 수업을 충실히 하지 않을수록 점점 더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마음잡고 수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점점 많아져, '나는 해도 안 되는구나.'라는 무력감이 커진다.

11. 이미 내 인생 X 됐나보다 - 절망감

'공부 못하면 미래가 암울하다.'는 말을 확신하면서 말하는 어른들도 있지만, 학생들에게 겁을 주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려고 말하는 어른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는 학생들은 현재도 공부를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자신이 없다고 스스로 많이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내 인생 X 됐나보다'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절망감을 느낀다.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12. 너 때문이야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면 견디기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남탓'을 하게 된다. '친구 잘못 만나서 너무 놀았어.', '우리집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안 좋아.', '선생님들이 너무 못 가르쳐.', '수업 시간에 애들이 너무 떠들어 공부를 할 수가 없어.', '한국의 교육제도는 엉망이야.'라며 '남탓'을 통해 고통을 줄이려 한다. 그런데 남탓을 할수록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라는 무력감과 타인에 대한 원망이 커져서 공부를 더 안 하게 된다.

13. 악순환

1~12의 과정이 뒤엉키면서 되풀이되면, 점점 더 공부를 안 하게 되고, 성적은 더 떨어지고, 불안감, 무력감, 자책감, 절망감 등은 더 커지고, 자기 비하는 심해지고, 자존감은 더 낮아지는 악순환에 깊이 빠져든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공부뿐만 아니라 매사에 자신감을 잃게 되고, 삶에 대한 의욕마저 줄어든다.

14. 에이, 안 해

악순환에 빠져들면 공부를 차츰 포기하게 된다. '나는 역시 해도 안 되는구나. 에이, 안 해.'라고 무력감이 커지면서 포기하게 되고, 포기하면 '내가 안 해서 그래'라는 방어기제를 계속 쓸 수 있어서 포기를 선택한다. 한편,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풍토가 노력하다 실패하는 것보다 노력 없이 실패하는 즉,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학생들 사이에 퍼뜨리고 있다.

15. 의미 없는데 왜 해

공부를 포기하면, 불안감과 무력감이 더욱 커져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절망감을 느낀다. 따라서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이솝 우화에서 여우가 포도를 따먹으려다 실패하자, 못 따는 게 아니라, 신 포도라 안 따먹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은 의미나 가치가 없으므로, 나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포기를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도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공허한 변명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안다.
한편, 학교 시험과는 거리가 먼 책을 읽거나, 자신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취미 생활에 몰두하고, 취미를 직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포기하고 허송세월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16. 난 대학 안 가

대학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대학을 가지 않고 살아갈 길을 모색하려 한다. 나름대로 이런 저런 구상을 하지만, 대학을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갈 것 같아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 힘들고, 찾았더라도 이미 패배감,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상태라 진로를 열심히 개척해나가기 힘들다.

17. 몰라,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공부는 못하지만 내 인생은 잘 풀릴 거야'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희망적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은 금방 무너지고, 불안감이 밀려든다. 밀려드는 불안감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몰라,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라며 생각을 더 이상 하려 하지 않는다. '몰라요', '그냥요', '싫어요', '짜증나'라는 말을 자주한다.

18. 잠과 게임 속으로

'공부 못하면 인생 X된다.'는 생각, 심하면 믿음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이때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에 '잠자기'이고, 학교 밖에서는 '컴퓨터 게임'이다. 수업 시간에 잠을 자면, 수업을 들어도 이해 못해서 생기는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과 자신을 스스로 비교하면서 생기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면, 현실을 외면할 수 있고, 게임을 하면 할수록 게임의 단계나 레벨이 올라가므로 공부와 달리, 자신이 유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게임에 점점 빠져든다.

19. 나한테만 왜 그러는 거야

14~18의 과정이 악순환하면서 절망감이 깊어지면, 절망감이 울분으로 바뀌어 교칙에 어긋나거나 학생의 본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고, 심하면 학교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 행동에 대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질책을 받아도, 질책으로 인한 자책감을 '나한테만 왜 그러는 거야.'라는 억울함으로 변질시키면서, 문제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기도 한다.

20. 어쩔 수 없다, 이젠 늦었어

고3이 되면, 더 이상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내가 안 해서 그래. 이제부턴 열심히 할 거야.'라는 자책감으로 무력감과 절망감을 버텨낼 수 없게 된다. 공부 안 한 것을 크게 후회하지만 '이젠 늦었어.'라며 절망에 빠져든다. 어떤 생각으로도 자신을 위로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무기력과 우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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