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광 평택시장 배출한 고향마을 차분한 표정

현덕면 덕목리는 곡부 공 씨 집성촌 당선 축하잔치도 자제

검토 완료

허성수(sungshuh)등록 2014.07.16 10:00
7월 1일부터 민선6기 평택시정을 이끌기 시작한 공재광(51) 평택시장은 고향에서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청와대 행정관으로 마지막 공직을 은퇴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공재광 시장의 생가 지금은 큰형 공재설 씨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는 공재광 시장의 생가 입구. ㅁ자 구조의 지극히 서민적인 전통가옥이다. ⓒ 허성수


그가 지난 1월말 청와대를 떠나 고향에 와서 출사표를 던질 때만 해도 지역주민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해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새누리당의 예비후보로 나가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널리 알려진 후보들을 제치고 본선에 올라갔고, 6·4 지방선거에서 행정고시 출신의 3선 현역시장을 여유있게 꺾고 평택시장에 당선됐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가 기댈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한 언덕은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그의 고향이었다. 현덕면은 2014년 5월 현재 인구 6361명에 불과한 전형적인 시골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말처럼 이번 선거에서 현덕면은 공재광 후보에게 77.1%의 표를 던져 평택시 22개 읍·면·동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게다가 공 시장이 태어난 덕목리는 곡부 공 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현덕면 전체적으로도 곡부 공 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1위라고 한다.

모교 광덕초교는 분교로 명맥 유지
6월 20일,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를 찾았다.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으로 이뤄진 평택의 지리는 어딜 가나 비슷했다.
덕목5리까지 나눠진 마을은 넓은 들판 가운데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현덕면사무소 쪽에서 남북을 잇는 서해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를 타고 좁은 지방도인 현덕로를 달려 대안리에 도착했다.

지금은 현덕초등학교 분교로 전락한 광덕초등학교를 만났다. 공 시장의 모교로 그는 20회 졸업생이다. 이 학교 9회 졸업생으로서 공 시장보다 11년 선배인 공병인(66) 곡부공씨어촌공파종친회 이사는 학생수가 격감하면서 오래전에 폐교 위기에 처했으나 동문들이 나서서 막았다고 했다.

"지금 70명의 학생들로 분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40명 이하로 내려가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처음에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또래의 졸업생들이 모여 총동문회를 조직하고 가까운 시내에 나간 동문 가족의 자녀들을 모교로 입학시키도록 했지요. 6~10회 동문들이 똘똘 뭉쳐 학교에 통학버스를 사서 기증하고 운영비와 장학금도 대줬습니다."

이 같은 동문들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비교적 가까운 이삼십리 밖 안중읍에 나간 동문들이 자녀들을 광덕분교로 보내기 시작했고, 교사들도 작은 시골학교의 장점을 살려 아이들을 위해 특화된 프로그램을 도입해 교육하면서 폐교 위기를 넘기고 1995년부터 분교 형태로나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생가에 노모 큰아들과 함께 지내
대안리에서 북쪽으로 5분 가량 승용차로 달려가면 공재광 시장의 고향 덕목4리다. 마을 입구에 덕목보건진료소가 있다. 그곳을 지나쳐 마을 남쪽 끝자락에 공재광 시장의 생가가 있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된 마을길을 끼고 오른쪽에는 포도밭, 길 왼편에는 공 시장의 생가로 지금 큰형 공재설(62) 씨가 포도농장을 가꾸며 노모를 모시고 산다.

현덕초교 광덕분교 공재광 시장이 다녔던 광덕초등학교가 지금은 현덕초교 광덕분교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허성수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의 전통가옥이 지극히 소박하고 서민적이었다. 공 시장의 형수 박옥화(61) 씨가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다가 낯선 객에게 문을 열어줬다.

"1978년 서울에 살다가 처음 이곳에 시집왔을 때 시동생(공 시장)은 안중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어요."
박 씨는 공 시장이 어릴 때 살았던 곳은 "저 위의 담집"이었고 자신이 시집오기 4~5년 전 지금 이 집으로 이사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큰형은 결혼 후 곧바로 서울로 갔다.
셋방을 얻어 두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며 어렵게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2년 후 동생 재광이가 고향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집안형편이 여의치 않아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형수 박 씨는 막내 시동생까지 먹이고 재워주며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줬다.

"그 때는 우리도 형편이 어려웠어요. 단칸방에 살 때였으니까."
취직하기도 쉽지 않았던 재광은 할부책 외판원을 시작했다.
"시동생이 금성출판사, 계몽사 책장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재광은 1년간 도서 외판원을 하다가 해양경찰에 지원, 입대했다. 3년 가까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재광은 9급 공무원시험을 쳐 합격했고, 1987년 평택시청 공무원으로 임명돼 청북면사무소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형제들 선거출마 극구 반대
"시동생의 성품은 부지런하고 곧았습니다. 하고자 하면 이루는 성격이었습니다. 실력은 좀 부족해 보였지만 뭐든지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승진을 잘 하더라고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근무를 했죠. 행정안전부에 있을 때는 밤새 할 일이 있다며 고향에 제삿날도 오지 못했습니다.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공직생활을 했으니까 자기 마누라한테는 빵점이었죠."

현수막으로 축하 분위기 느껴 덕목4리 마을 중앙의 4거리에 공재광 시장의 당선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평범한 시골마을에 큰 경사가 났음에도 공 시장의 반대로 마을사람들은 축하행사를 하지 않았다. ⓒ 허성수


시동생이 평택시장에 처음 나가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반대 하지는 않았을까?
형수 박 씨는 지난해 7월 시동생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다음해 있을 지방선거에 나가겠다는 말을 처음 했다고 기억했다. 큰형의 가족은 한사코 말렸다.
"우리는 모두 반대했어요. 시장을 왜 하냐고, 욕도 많이 먹고 힘드는 자린데…. 하지만 시동생은 지금 좋은 기회라며 시장에 꼭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2013년 3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직후 행정안전부 장관실에서 청와대로 부름을 받고 일하고 있었고, 비록 4급 서기관이었지만 형제들은 시장·군수 부럽지 않는 자리로 여기며 동생을 자랑스러워했다. 공 행정관은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도 대통령 표창을 받고 부이사관(3급)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를 내놓고 나와서 모험을 하겠다니, 특히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부인 조은주 씨는 정치에 전혀 경험도 없이 선거에 나섰다가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안정된 자리마저 잃고 남편이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아직도 공 행정관에게는 10년의 정년이 남아 있었다. 얼마든지 고위직으로 올라가 명예롭게 공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조 씨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남편 때문에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다가 큰 시숙과 큰 동서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동서가 형제들과 식사자리를 한 번 마련할테니 반대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형제들이 다 모여 설득했지만 시동생의 단호한 결심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아주 마음을 정하고 시장에 나가겠다고 선포하는데 어떻게 반대를 하겠어요."

그 후 6남매가 똘똘 뭉쳐 동생을 돕기로 했다. 막상 공 행정관이 시장선거에 나간다고 소문이 나자 공 씨 문중은 물론이고 마을의 여론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비판적으로 보면서 시장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똘똘 뭉친 6남매 선거운동 도와
덕목4리는 55가구가 살며 그 중 35~40가구가 곡부 공 씨 집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동생은 비관적인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올해 2월초 청와대를 사직했고, 곧바로 귀향,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우리 6남매가 똘똘 뭉쳐 선거운동을 도왔죠."
5월 하순 본선거가 시작되면서 공 후보의 형들과 누나, 막내 여동생까지 다니던 회사에 휴직계를 내거나 하던 사업을 잠깐 중단하고 선거캠프로 달려왔다. 그들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 6남매가 단합된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감동을 해 시동생을 많이 찍어줬는지도 모르겠어요."
대문간의 사랑방이 공 시장의 노모 조병희(83) 씨가 거처하는 방이었다. 박 씨가 문을 열어 보였는데 노모는 마실을 나가고 비어 있었다. 침소 머리맡에 공재광 시장의 크고 작은 선거포스터와 선거용 명함이 붙어 있었는데 집에서 다섯 째 아들이 당선되기를 밤낮 기도했을 노모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하는 날 밤 모든 형제들이 선거캠프에서 개표상황을 지켜봤다고 했다. 막상 당선이 확정되자 다음날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잔치를 열어 축하행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 시장이 극구 반대하며 만류했다고 한다. 

"청와대 행정관이 되었을 때도 우리는 마을에 현수막을 붙이고 싶었지만 시동생이 반대를 했어요. 나중에 시장에 나간다고 했을 때 청와대에 들어간 것을 미리 홍보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되더군요."

큰형 부부는 서울에서 2000년도에 내려왔다. 아버지가 1999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남게 되자 직접 모시고 살려고 남편이 귀향을 결심했다고 한다. 남편 공재설 씨는 6남매 중 가장 맏이로 공 시장보다 11년이나 더 나이가 많다. 지금은 포도를 재배하는 한편, 집의 한쪽 창고에 선반과 각종 기계를 설치해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나중에는 시동생을 인정해 주셨어요. 시동생이 당선됐지만 동네 사람들도 시장님의 뜻을 알고 취임하더라도 차분하게 지낼 것입니다."
덕목4리 마을 중앙 4거리에 공재광 시장의 당선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지역의 여러 단체와 동네이름으로 걸려 있을 뿐 평온하고 조용한 시골마을 모습 그대로였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