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아버지 사용설명서

따뜻한 남편, 자상한 아버지, 책임있는 가장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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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연(shescom)등록 2013.05.25 17:11

젊은 날 '한석봉'이라고 불리며 한문에 박식하고 필체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노인대학에서 취미로 시작한 서예작품으로 작은 규모의 대회에서 입선을 하셨다. 타인에게 한없이 베풀면서도 유독 엄마에게 가혹한 남편이었던 아버지는 재작년 암수술을 하고 투병중인 엄마를 끔찍하게 아끼며 간호하고 계신다. ⓒ 이재연


남편으로 가장으로 최악의 아버지......그러나.

여자들은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 친정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연세가 드시긴 했어도 몸이 편찮은 것도 아니고, 평소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딸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쪽에서도 딸 사랑이 지극한 건 더욱 아니다. 오히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만약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더라면, 우리는 대여섯 명, 어쩌면 그 이상의 여자를 새엄마로 맞이 했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로서 최악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격 혹은 외모가 매력있는 분일 거라는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우선 외모의 몽타주를 그린다면, 163cm가 될까 말까(?)한 작은 키에 포청천도 명함을 못 내밀 만큼 확실한 갈매기 형 이마, 더 이상 압축이 불가능한 두꺼운 근시 안경 너머로 번득이는 날카로운 눈빛, 호남형도 미남형도 거리가 멀다. 성격은 화가 나면 휘발성 화재현장에서 폭발하는 '유증'처럼 걷잡을 수 없고, 한 번 마음 먹으면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갈 망정 후퇴가 없는 고집불통에 세상만사 두려울 게 없는 독불장군이다. 부녀지간인 처지를 고려해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해도 성격이나 외모는 평균치 이하에 가깝다. 

나는 타인에게 한 없이 너그럽지만, 정작 가족들에게는 절대권력자로 군림하며 이기적인 아버지가 어릴 땐 정말 싫었다. 한 번이라도 부드럽고 따뜻한 아버지,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아버지이길 소원했다. 돌이켜 보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자식인 우리 의견 앞에서 당신의 의견을 슬며시 거두어들이는가 하면 집안 청소를 도와주는 등, 조금씩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칠순을 넘길 무렵이었다. 그것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우칠 어떤 계기가 준 결과가 아니라 칠순의 나이로 인한 노인으로서 외로움과 나약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    

아버지의 흉보기1박2일 합숙 훈련도 부족한 우리

젊은 날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저지른 횡포에 가까운 일화는 우리 4남매가 1박2일 합숙하며 이야기 해도 부족하다. 특히 두 오빠의 기억 속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심각하다.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신 아버지가 55세에 퇴직한 다음 25년째 아버지가 받으시던  월급의 두 배를 생활비와 용돈으로 드리고 있는 작은 오빠는, 자식에게 용돈을 받을 때마다 가질 수있는 자식에 대한 미안함과 자존심을 지켜드리기 위해 목돈을 통장에 넣어두고 풍족하게 쓰시도록 할 만큼 효자다. 이런 오빠도 어린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아버지로 부터 겪은 일들을 줄줄이 쏟아내곤 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가죽점퍼' 사건이다. 대구 시내에서 버스로 2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경북 칠곡의 깡촌에서 당시 경쟁률이 13대1을 웃돌던 대학에 원서를 내던 날, 아버지는 합격하면 오빠가 정말 입고 싶어 하던 가죽점퍼를 사주기로 약속을 하셨단다. 시골에서 참고서 하나 없이 혼자 공부해서 합격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당신이 입던 헌 가죽점퍼를 벗어주고 아버지가 새 점퍼를 사 입은 일이다. 아버지보다 족히 10cm는 키가 큰 오빠는 잘록한 소매길이에 끝단이 나달거리는 낡은 그 옷을 입고 다니며 창피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결혼해서 아버지가 되면 그날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된 후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 게으르기로 말하면 배짱 이가 울고 가야 한다. 면사무소 말단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도박으로 온 가족이 거리에 나가 앉을 지경이 되자, 휴일에 동네 품일을 가신 적이 있었다. 리어카에 냇가의 돌을 싣고 와서 어느 집 돌담을 쌓는 일이었다. 두 어번 다녀온 후 귀찮아진 아버지는 멀쩡한 우리 집 돌담을 실어다 준 것이다. 욕실이 집안에 있어도 세숫대야에 물 담아 방안에 대령한 물로 발을 닦고, 생쌀을 먹을망정 밥 한끼를 해 본적이 없는 아버지, 어쩌면 가족에게 남보다 못한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 걱정 마시고 즐겁게 사시길

이런 아버지가 남에게는 한없이 양보하고 관대하다는 건 가족인 우리 입장에서 분통이 터질 일이다. 남의 부탁이라면 어떤 것도 거절 하지 못해서 돈을 빌려 줬다가 떼이는 건 기본, 보증을 서주고 당한 것도 몇 번, 외판원들이 아버지를 만난 날은 횡재하는 날이다. 이렇게 밖에서 매너남인 아버지는 평생 엄마에겐 철없는 아이, 물가에 내 놓은 막내 같은 존재였다. 불과 몇 해 전까지도 엄마의 불만이 봇물처럼 터지곤 했다. .
"아버지가 주말마다 등산 다니며 과부 아줌마들에게 음료수며 커피 사주느라 돈을 '펑펑'쓰고, 누가 꼬드기면 의논도 없이 물건을 사들이는 통에 속상하다"는 것. 여자들에게 음료수를 사 주는 게 싫은 건지, 돈을 쓰는 게 싫다는 말인지 아리송한 고자질을 한참 하던 엄마는 수화기를 아버지께 넘기면서 딸에게 '혼이 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만 친다"고 구박 당하는 아버지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안스러워지면서 연민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걸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자식, 그 중에서도 막내 딸이다. 잔 정없는 아버지였지만 막내 딸인 나에게는 부족하나마 사랑을 표현한 편이었고, 나이 들면서 아버지가 솔솔 밉지 않던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지만 차마 엄마 앞에서 내색 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 

수화기를 받아 든 아버지도 딸의 잔소리를 예상하신 듯 말이 없으셨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가만히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제가 하는 말 듣기만 하세요. 돈 걱정 하지 말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놀러 갈 곳이 있으면 친구든 과부든 즐겁게 지내세요. 친구분들과 밥값이나 음료수를 먹을 때는 아버지가 먼저 내셔서 친구 많이 사귀시고  대신 엄마 눈치 채지 않게 해야 아버지도 엄마도 편해요. 대신 엄마랑 함께 어딜 가면 무조건 '엄마 우선'잊지 마시구요. 집에서도 엄마 잘 챙겨주시고 외출해서 돌아오면 손도 자주 잡아주면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말고 아셨죠?."
아버지는 '응 응' 대답만 하시다가 '허허' 한 번 웃으시곤 끊으셨다.

팔순 넘긴 아버지가 돈을 쓰면 얼마나 쓰고, 물건을 산다면 얼마나 살까. 고가의 해외 명품을 산다면 엄마지 아버지는 아니다. 기껏 사는 것이 온갖 감언이설로 노인들 꾀어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 효과없는 보조식품이나 관광을 핑게삼아 젓갈이며 특산품 구입하는 정도란 걸 알기때문이다. 이마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받법이며 나이 든 사람들의 소일꺼리라일 뿐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장면 사주며 자식 자랑하는 재미, 공장 ;땡처리'하는 창고 형 매장에서 한 컬레 만원자리 운동화에 옷 한 두가지 사는 게 쇼핑의 전부일 것이다.
또 엄마의 심기를 가장 건드리는 과수댁과 어울린다고 배다른 동생을 낳아 올 것도 아니다. 엄마가 알면 서운하겠지만 자식 입장에서 그것은 아버지가 아직 삶에 대한 열정이 있고 건강하다는 분명한 증거이므로 하등 말릴 이유가 없다. 실제로 오빠는 외국을 다녀올 때면  정력에 좋다는 약재를 사다 드리기도 한다.
엄마 마음도 백번 알고 있다. 젊은 날 아버지가 엄마에게 지은 죄는 어마어마 하다. 그러나 자식들이 엄마의 화풀이를 대신 갚아주길 바라는 건 아닐 터, 그저 하소연임도 알고 있다.
"엄마, 아버지가 과부 아줌마들 커피 사주러 산에 가실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우. 그 연세에 중풍 걸려 대소변 받으며 누워계시면 어쩌겠어. 우리 자식들이야 한번씩 삐죽 얼굴 내밀고 '엄마, 아버지 어떠세요'물어보기나 하고 병원비 내는 게 전부겠지. 병원비 쓰는 거보다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하면 안될까?"

아, 아버지......

어릴 적 그렇게 싫어 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에너지가 넘쳐 젊은 시절 그렇게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는, 팔순이 지난 지금도  월요일엔 등산, 화요일엔 서예, 수요일엔 장고를 배우고 목요일엔 종친회 일을 하신다. 8년 전 그날 도 서예를 끝낸 다음 우리 집으로 오신다는 전화를 하셨다. 하필 그날 나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쇼핑을 하던 중이었고, 내가 돌아 올 시간까지 아버지는 자장면을 드시고 목욕탕에서 기다리기로 하셨다. 서둘러 돌아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방송으로 몇 차례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남자목욕탕 앞으로 가서 관리인을 찾고 있을 때, 런닝 차림의 누군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아버지였다. 수 십 년 동안 산 만한 크기와 무게로 우릴 꼼짝 못하게 하던 그 아버지가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느껴져다. 헐렁한 런닝 셔츠만 걸친 몸에저승 점이 군데군데 피어있고, 수증기로 벌겋게 달아올라 깊어진 얼굴 주름 사이엔 땀이 물처럼 흘렀다. 안경을 벗은 눈동자는 회색 빛으로 희미해 보이고  키는 더 작아져 초등학생만 한 왜소하고 초라하기만 한 아버지, 내가 알고 있던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저 기력이 쇠해 진 한 노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 내가 오늘 아버지와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 한 번을 놓쳤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성인이 된 이후 밥이든 옷이든 돈으로 사드리는 건 항상 내 쪽 이었으므로, 나는 늘 내가 아버지께 '점심 먹을 기회'를 드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기회를 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단돈 몇 천원으로 나는 자장면을 사드릴 수 있었고, 귤을 까서 입안에 넣어 드릴 수도 있었다. 내가 천만금을 가진 부자라 해도 아버지가 떠나셨더라면 자식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곁에 살아 계심만으로도 세상 최고의 축복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우둔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울고 있는 딸을 보면 놀라실까봐 급히 눈물을 닦으며,툭탁툭탁 발소릴 내며 주차장으로 달려가 자동차 시동을 켰다. 만약 앞으로 매일 아버지랑 점심을 먹는다 해도 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앞으로 몇 일이나 남았을까 생각하는데 가슴이 '쿵'하며 조바심이 났다.
아버지 환갑 잔치 때 나는 미혼이었고 칠순에 잘 해드리면 된다는 걸 위안삼았다. 칠순이 되셨을때는 갓결혼했다는 핑계로 또 대충 넘어갔고 어느새 세월은 십여년이 훌쩍 가버렸다. 이유란 그때마다 생기기 마련인 것을. 자책하고 있을 때 목욕탕  문을 나서는 아버지가 보였다. 달려가서 팔짱을 꼭 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아버지다."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먹물이 튀어 더러워진 런닝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라고 했더니 '아침에 입은 깨끗한 옷'이라며 거부하셨다. 새 옷은 사위 입히라는 의미라는 걸 알지만 '엉덩이 맞을래?' 소리치며 더러워진 아이 옷을 갈아 입히는 엄마처럼, 두 팔을 위로 들게 한 다음 억지로 갈아 입혀드렸다. 젊은 날  강하고 독선적인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 것이 싫고 원망스러웠지만 나이들어 힘없는 노인이 된 아버지를 원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지금 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그렇게 소원하던 아버지인데, 행복하지 않고 아프기만 한 건, 마음 속으로 아버지 사랑을 많이 기다렸고 그만큼 나도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제 개인 홈페이지에 비슷한 내용으로 게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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