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실명 좌절 딛고 섬기고 봉사하며 살죠

한국시각장애인협회 화성시지회 이돈규 회장

검토 완료

허성수(sungshuh)등록 2013.04.16 18:53

"지금 캄캄해도 옛날 봤던 것 다 기억해요" 오랜 기간 병마와 싸웠던 흔적이 그의 얼굴에 남아 있다. 훤칠한 키에 얼굴은 다소 마른 데다 검은 얼룩마저 드러났으나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밝았다. 그는 시력을 잃기 전에 보았던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심지어 재혼한 아내의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까지도... ⓒ 허성수


4월 9일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댄다. 화성시 남양동 보훈회관 1층에 있는 화성시시각장애인협회 사무실 안은 따뜻했다. 햇빛이 스며드는 창 쪽 자리에서 이돈규(55) 회장이 일어나며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서너 걸음 거리에 있는 소파로 조심스럽게 몸을 옮기는 그가 불안해 보였다.

환한 세상 살다가 7~8년 전 실명

그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밝고 환한 세상에 살던 사람이었다. 건강한 눈을 갖고 태어나 40여 년 동안 마음껏 보고 살았던 그가 중년의 나이에 시력을 잃었다. 정신적으로 크게 낙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도 처음에 우울증을 겪었죠. 죽고 싶은 생각도 했지요. 하지만 주변의 격려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빨리 극복했어요. 특히 2003년에 천사 같은 아내를 만난 것이 큰 힘이 됐죠."
재혼한 부인을 말하는데 지금도 그의 든든한 후원자요 안내자로서 같이 잘 산다. 그러나 혼자서만 행복하게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경력이 길지도 않은 그가 지난 해 4월부터 한국시각장애인협회 화성시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유다. 뛰어난 리더십, 말과 글을 통해 정곡을 찌르는 논리로 불의를 물리치는 정의감이 지역의 동료 시각장애인들을 움직였다.
"제가 맹아학교 출신도 아니고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경력도 얼마 되지 않은데 회원들이 저를 지지해 줬어요."
중앙회에서도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기도 한 최동익 회장이 그를 한국시각장애인협회 이사로 발탁했다.
"회장님이 저에게 같이 일해 보자고 하셨어요. 저는 도회장도 아니고 지방의 시지회장으로서 중앙회 이사로 활동하는 것이 분에 넘치는 일이죠. 게다가 맹아학교 출신도 아니고 협회 활동한지도 얼마 안됐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어렵게 승낙했죠."
중도실명자보다 선천성 시각장애인들이 많은 단체의 성격상 맹아학교 출신이 아니면 지도부에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단다. 한국시각장애인협회 화성시지회 김순철 부지회장(58)은 이돈규 지회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돈규 회장님은 불의를 못 보는 분입니다. 또 우리가 장애를 갖고 있어도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려고 무척 애 쓰시고 우리보다 못한 어려운 사람도 주변에 많이 있다며 적극 돕는 분입니다."
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탈피하기 위해 그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만든 시각장애인 봉사단체가 '여명회'다. 여명회는 한국시각장애인협회와 별개의 단체로 매년 음악회를 열고 그 수익금으로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

간절히 기다리던 봄 햇살을 맞으며 한국시각장애인협회 화성시지회를 함께 이끌어 가는 김순철 부지회장(왼쪽)과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지회 사무실 뒤뜰에서. 김순철 부회장도 중도실명 시각장애인이다. ⓒ 허성수


사회학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첫 직장생활

이 회장은 충남 보령이 고향으로 충남대 사회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우전자에 입사했다. 그가 근무한 곳은 서울역 앞 20층짜리 대우빌딩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우가 잘 나갈 때여서 지방대 출신으로서는 입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이 무척 부러워했지만 그는 2년을 다니다가 사직했다. 첫 직장에서 일찍 그만둔 이유는 서울의 주요 명문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직 속에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고. 게다가 상사들이 출장비 따위를 부풀려 부당하게 공금을 챙기는 등 부조리한 관행도 그를 심각한 갈등에 빠트렸다. 결국 그는 양심선언을 한 뒤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음반가게를 열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취미는 음악이었다. 지금도 그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재미있었고, 돈도 많이 벌었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순수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요."
그러나 음반가게도 오래 하지 못했다. 미국에 이민을 가려고 가게를 그만뒀다.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택시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다가 미국이민은 아예 없었던 일이 돼 버렸다.
"택시기사를 해보니 제 성격과 꼭 맞아 너무 좋은 거예요. 회사의 간섭 안 받고 하루종일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고 좋아하는 음악도 마음껏 들을 수 있었어요."
막상 택시기사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미 회사에는 노조가 조직돼 있었지만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노조 조합장이 회사 대표와 같은 고향이었어요. 택기기사들이 임금을 착취당하며 부당하게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조합장은 늘 회사 편을 들며 적극 투쟁하려고 하지 않았죠."
노조원들도 회사 측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를 펴지 못했다.

노조 지도자가 되어 택시기사들 권익옹호

"택시기사들의 꿈은 개인택시를 받는 것입니다. 7년 근속에 3년 무사고 기록이 있어야 개인택시 자격증을 받는데 이런 조건이 기사들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한 회사에 목을 매게 합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기사가 오래 근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사를 무단해고할 수는 없었으므로 멀리 이사를 가는 방법으로 스스로 사직하게 만들었다.
"김포공항 근처에 있는 회사가 의정부 방향으로 멀리 이사를 가버리면 기사들이 생활권이 달라져 출퇴근하기가 어렵고 가족이 함께 이사하는 것도 쉽지 않아 사직할 수밖에 없어요. 노조가 있었지만 근로자들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동료들이 저에게 자신들을 대변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노사위원의 한 사람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가 생활 근거지에 있던 회사를 멀리 옮겨 가는 것이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만일 이사하게 되면 기사들에게도 이사비용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으로 소재지를 옮겨갔다. 그 후 회사는 그를 제거할 구실을 찾았다. 곧 빌미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1987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중형택시가 처음 나왔어요. 스텔라였는데 새 차를 받아서 몬지 얼마 되지 않아 택시를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그해 10월 어느 날이었다. 그가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손님을 태운 후 잠깐 가게에 담배를 사러 갔다 온 사이 택시가 없어졌다. 금세 태웠던 손님이 택시를 끌고 도망가 버린 것이었다. 경찰에 곧바로 신고했지만 택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빈손으로 회사에 돌아가니 저에게 아무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사표를 쓰고 나가달라고만 했어요. 저는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내쫓기 위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표를 쓸 수 없었죠. 당시 저는 회사와 교섭하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보름 쯤 지나 잃어버린 택시를 찾았다. 경남 합천경찰서에서 택시를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다. 범인은 거기서 불법영업을 했는데 해인사로 서울택시가 자꾸 드나드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경찰에게 덜미가 잡히고 만 것이었다.
"경찰이 저 보고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범인은 애초부터 택시를 탈취할 목적으로 승차했고 몸에 칼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대로 출발했더라면 생명을 위협하며 차를 빼앗았을 것이 틀림없었죠. 그러나 그를 태우고 나서 잠깐 담배 사러 간 것이 오히려 제 생명을 안전하게 지킨 셈이 되었죠."
합천에 내려가 택시를 찾아왔지만 회사는 여전히 그에게 사퇴를 강요했다.
"회사에서 배차를 시켜주지 않았어요.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항의하자 회사는 저에게 단체규약에 중대한 실수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는 조항을 보여주며 해고사유가 된다고 압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해고사유가 인정되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죠. 징계위원회는 노사 동수이기 때문에 저는 반드시 부결될 줄 알고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해고였다. 노조 측의 일부 위원들이 회사 측에 매수된 것이었다.
"노동자 중에 저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조합장이 묵인하는 대가로 회사로부터 몇 천만 원의 돈을 받았고, 자신도 몇 백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노동위원회에 진정을 했죠. 하지만 노동위원회는 기각을 했습니다. 결국 민사소송을 했죠. 회사를 상대로 혼자서 싸웠습니다. 노동자들은 심정적으로 저를 동조하면서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회사의 눈치를 봤습니다. 회사는 돈 있고 힘 있으니까 변호사를 사서 대응했지만 저는 혼자 법률서적을 사 보며 타자기로 소장을 작성해야만 했습니다. 기득권자와 싸우려면 보통 강단으로 못합니다. 저는 다른 데 취직도 할 수 없었고 시간과 돈을 들여 싸워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재판은 계속 연기되기 일쑤여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싸우는 동안 노동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뇨로 건강악화 세 번의 수술도 실패

그는 회사 측과 유착된 어용 조합장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던 그가 나중에는 조합원들의 태도가 매우 냉담한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내놨다. 그 후 이돈규 회장은 단독후보로 나가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조합장이 됐고, 회사의 불합리한 임금체제를 고치며 연임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는 충실하지 못했다. 돈도 벌지 못한 채 빚만 늘었다. 그는 1993년 택시기사를 그만두고 나와 여행사를 시작했다.
"제가 노조 위원장까지 사표내고 나가니 회사에서 은근히 반색을 했습니다. 한 해만 더 택시를 몰면 저도 개인택시가 나오는데 과감하게 포기했죠."
여행사를 차린 후에는 외국 출장이 잦았다. 그러나 몸에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몸무게가 자꾸 줄어드는 거예요. 90kg이 넘던 몸이 불과 몇 개월 사이 20~30kg으로 줄더군요. 늘 입고 다니던 옷도 맞지 않았어요. 간호사였던 처제가 깜짝 놀라 얼른 병원에 가서 혈당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어요."
소변검사를 통해 혈당 수치가 600 이상 나왔다고 했다. 당뇨가 심각한 상태로 곧장 입원해야 했다.
"친구에게 여행사를 넘기고 2년간 투병했습니다. 그 사이 혈당 수치가 200 이하로 낮아지니까 겨우 살겠더군요." 
그는 다시 서울 여의도에서 렌터카 영업소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여동생의 권유로 화성에 내려와 건설업을 손에 댔다. 조립식 공장건물을 지었는데 당시 화성은 한창 개발붐이 일고 있었으므로 경기가 좋았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야 했으므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당뇨가 재발되었다. 세 번이나 수술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불의를 보면 못 참아 이돈규 회장은 1977년 유신시대였던 고교 3학년 때 이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비로소 그는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됐고 대학에 가서 사회학을 선택하게 된다. ⓒ 허성수


인터넷에 글 올리며 세상과 소통하는 삶

그는 시각장애인이 된 후에는 컴퓨터로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이 개발돼 있어서 그것을 익히면 정상인처럼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인터넷 사이트에 부지런히 글을 올렸고, 네티즌들로부터 뜨거운 호응도 얻어냈다.
"제가 건강하던 시절 쌓았던 지식과 사회경험에 대해 쓰다 보니 시각장애인들이 읽고 매우 재미있어 했습니다. 저에게 호기심을 갖고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 오고 싶은 사람은 다 오라고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50명 정도 방문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그 많은 손님들을 다 대접했지요."
물론 재혼한 아내와 그녀가 낳아 길렀던 두 명의 자녀들을 말한다. 지금도 가족들이 장애인들을 위해 하는 일에 대해 적극 밀어준다고 했다.
"지금 미국에 공부하러 간 새 아들은 제가 지회장 선거운동할 때 늘 함께 다녔어요. 그때 아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아버지 존경합니다'는 말을 처음 했어요. 저는 큰 감동과 보람을 느꼈죠. 아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달리 보게 되었다는 고백도 하더군요."
이돈규 회장은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받고 있는 사랑 감사하면서 아직 그 사랑 받지 못한 채 늘 집에 갇혀 지내는 시각장애인도 많다며 바로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내 소통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협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