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검토 완료

이근승(gnsnglee)등록 2013.03.21 10:03
저 복도 끝, 어둡고 음습한 구석 모퉁이에서 흘러나온 끈을 더듬어 가면,
가려진 장막을 거두어 아슴푸레 스며 나온 실루엣을 따라가면,
...................... ......................

불면으로 지새웠던 내 가여운 청춘이 머물렀던 자리, 벽에 핀 곰팡이가 그나마 화려했던 미아리 자취방이 있다. 그리고 삶과 존재의 의미,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들로 뒤척였던 내 청춘을 만난다.

철없이 밤을 보내다 발정이 난 고양이 울음소리를 좇아 연탄재를 집어 던지고, 꽁초마저 바닥난 재떨이를 훑어 새벽을 맞이하던 푸르른 내 이십대.
볕이 드는 창가에 널어놓은 담배꽁초. 하릴없이 온갖 것들이 스멀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에, 풀어서 연기로 날려 보내야 했던 내 서러웠던 젊음.

세상과 살아감과 그 이름도 알지 못하는 존재까지 의미를 찾고자 했던 그 격동과 불안과 허무와 ......... 그리고 이 암울한 시간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떨었던 내 가여운 청춘.

누구나 그렇다고, 모두의 젊음은 다 그런 거라고, 혼자 우세 떨지 말라 하여도 ..............
다시 들춰 보고 싶지 않는, 생각만 하여도 생채기부터 나오는, 새파랗게 아픈 내 지난날이 있다.

무미건조했던 대학 생활.
그 껍질을 집어던지고 막노동판에 뛰어들어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던 세상 밖으로.

2개월 계획이 20개월이 되었어도 마냥 좋아 향수병 한 번 앓지 않았다.
유럽만 돌아 보리라던 여정이 중동을 거쳐 인도, 아시아로 향하고,
아! 내가 밟아 돌아온 길들이 실크로드였구나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을 향해 내 온 몸은 마구 달려들어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이제 세상에 태어난 간난 아기처럼 나는 순진무구하였고, 그래서 세상의 일들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 앞뒤 재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가는데 용감했었다.

얼마나 많은 해프닝들이 있었던가.
아침 눈을 뜨고 잠이 들때까지, 아니 꿈속에서도 몸은 세상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름 모를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에 피곤에 지쳐 뻗어버리면 몸은 천근만근이나 두뇌의 촉수는 더욱 날카로워져 벽을 뚫고 지붕을 넘어 세상 밖으로 뻗어 나갔다.

얼마나 웃어젖힌 날들이었던가.
밤마다 그 날 있었던 해프닝에 기가 막혀 터지는 웃음보를 감싸며 미친놈처럼 홀로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적어도 나는 삶과 존재의 의미에 피로하지 않았고, 불안이 말하는 연민과 허무에 절망하지 않았다. 세상이 주는 기쁨을 담기에도 벅찬 시간들이었다.

행복하였다.

니아사 호수 말라위 호수라고도 하며, 탄자니아와 말라위를 가로지른다. ⓒ 이근승


시간은 돌고 돌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오고, 눈이 내리고 새싹이 돋아나고.

모든 것은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오건만, 친구는 불룩한 배를 내민 아저씨가 되고 부모는 늙고 병들어 존재의 의미를 다하고, 난 연탄불같이 시퍼런 청춘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갔다.

서른을 지나 마흔을 목전에 둔 시절.
몇 평 안 되는 가난한 사진관 모퉁이에서 아이를 얼러 돌 사진을 찍는다.
다른 일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구시렁거리면서 그나마 용케 버텼다.

그러나 점심시간, 유일한 안식처인 나무그늘 아래 담배 한모금 물어보면,
어차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한낮의 땡볕처럼 시들한 일상.

그 옛날 솟구쳐 뿜어 나왔던 열정이 밀어 넣은 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었던 혼돈이 다시 찾아온 건 아니었다.
가위에 눌려 설치던 미몽 속, 반쯤 잠긴 눈꺼풀에 들어온 지난날 풍경의 한 자락도 아니었다.

그냥 또 다시 그렇게..
목젖까지 차올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처럼 .
나이와 변화가 말하는 시공간의 프레임에 질식해 가고 있었다.

뚜렷한 이유나, 주먹을 쥐어야 할 목적의식이 아닌,
어쩌면 지난날을 기억하던 내 안의 촉수 하나가 그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

탄자니아 에야시 호수 세렝게티 아래에 있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위치한 소금 호수로서 건기엔 바닥을 드러낼 만큼 바짝 말라 버린다. ⓒ 이근승


시간은 흐르고 공간도 흘러,
탄자니아, 말라위와 모잠비크를 거쳐 마콘데와 쇼나 조각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

이곳은 짐바브웨 하라레, 그리고 조그만 게스트 하우스,
앞에 앉은 다큐를 찍는 흑인 남자와 얘기를 한다.

조금이라도 유식하길 자랑하는 먹물 쟁이라 , 아프리카에 대해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삼류 모가지에 핏대를 세운다.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 거기다가 해결 방안까지... 훗, 우습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다 갑자기 검은 뿔테를 쓴 흑인 남자가 망치로 내 머리를 내리친다.
'넌 한번 생각해 본 적 있냐?
왜 다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부자 나라에서 태어났고,
누군 가난한 아프리카 땅에서 태어나 이 지랄 같은 삶을 견뎌야 하는지..;

태어나자마자 결정되는 운명적 존재에 대해서....
지난 젊은 시절, 이 하나로 수없이 많은 날들을 불면으로 지새웠다.
그러다 마흔이 넘은 중년의 모습으로, 역시 중년이 됨직한 흑인 사내로부터 이 가난한 아프리카 땅에서...   그 얘기를 다시 듣는다.

뜰 안의 나뭇잎이 바람에 스친다.
제기랄, 오늘밤 잠자기는 글렀구나.......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