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목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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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철(뿌리깊은나무)등록 2013.03.18 15:13
한글은 목숨이다?
1930년대에 외솔이 단골로 다니던 주점(酒店) 공책에 「한글은 목숨이다.」라고 쓴 외솔의 친필(親筆)이 발견(發見)되었다고 외솔교(?) 광신도(狂信徒)들이 요란법석을 떤 적이 있다.
그 문구(文句)는 사뭇 그가 한글이라는 것을 목숨처럼 아낀다는 뜻이다.
사실(事實) 외솔은 한글을 목숨처럼 아껴야할 뚜렷한 명분(名分)이 있다.
그것은 1930년대에 신(神)처럼 존경(尊敬)하는 오꾸라신빼이(小倉進平)와 자기(自己)를 키워준 담임선생(擔任先生)인 다까하시데이(高橋亭)와 손발을 맞추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파괴(破壞) 작업作業)인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만들고 그것을 「한글」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외솔이기 때문에 그가 한글이라는 체계(體系)에 대해서 남다른 애착(愛着)을 가질만한 이유(理由)가 성립(成立)한다.
외솔이 세종대왕(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訓民正音) 체계(體系)보다 자기네들이 만들어 놓은 한글 체계(體系)를 자기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조국(祖國) 광복(光復) 후에도 외솔은 일제의 잔재(殘滓)인 한글이라는 체계(體系)를 영원히 유지(維持)시키기 위해서 일제(日帝)로부터 받은 식민교육(植民敎育)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면서 한자(韓字)는 중국(中國) 글자이니 버리고 한글만 쓰라고 한글전용(專用)을 외쳐왔다.
이러한 행티는 자기야말로 가장 세종대왕(世宗大王)을 존경(尊敬)하며 진정한 애국자(愛國者)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實狀)은 애국(愛國)의 가면(假面)을 쓰고 지난날의 친일행적(親日行蹟)을 은폐(隱蔽)하려고 얕은꾀를 부리는 것이다.
외설교(?) 신도(信徒)들은 그가 학창시절(學窓時節)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入敎)하였다느니, 주시경(周時經)이 운영(運營)했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을 열심히 다녔다느니 하며 과대선전(過大宣傳)을 하고, 그 위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대종교(大倧敎)와는 아무런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이 마치 대종교(大倧敎)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정치사건(政治事件)으로 역사(歷史)를 날조(捏造)하고 왜곡(歪曲)해가면서 그를 치켜세우기에 급급하고 있다.
그가 대종교(大倧敎)에 입교(入敎)해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를 묻고 싶다.
그는 대종교(大倧敎)에 다니다가 담임선생(擔任先生)인 다까하시데이(高橋亭)의 회유(懷柔)에 세뇌(洗腦)를 당하여 중단(中斷)하고 그의 추천(推薦)과 신원보증(身元保證)을 받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選拔)되어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를 졸업(卒業)하고 귀향(歸鄕)하여 잠간 동래보통학교(東萊普通學校) 교사(敎師)로 근무(勤務)하였다.
과연 그가 그 학교(學校)에서 한글을 가르쳤을까?
그는 한글이 아닌 일본어(日本語)를 가르쳤다.
이것이 항일투쟁인가?
우리나라를 강탈(强奪)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주는 돈으로 공부를 했다는 것이 과연 항일투사(抗日鬪士)의 대접(待接)을 받을만한 업적(業績)일까?
그 당시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選拔)되려면 제일 먼저 고려(考慮)되는 것이 사상문제(思想問題)이다.
천황폐하(天皇陛下)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 대하여 충성)忠誠)스러운 사상(思想)을 가진 자(者)가 아니면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選拔)될 수 없는 시절(時節)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思想)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選拔)될 정도로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 물이 들어 그들의 개다리가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외솔교(?) 광신도(狂信徒)들은 조선(朝鮮) 사람으로는 유일(唯一)하게 외솔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選拔)되었다며 사뭇 자랑거리로 지껄이고 있다.
과연 그것이 떳떳하게 자랑할 만한 일일까?
그리고 다시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1925년에 교또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을 졸업하였다.
당시에 제국대학(帝國大學)이라는 곳은 충성(忠誠)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들을 양성(養成)하기 위해서 천황(天皇)이 설립(設立)한 대학(大學)으로 천황(天皇)에게 피로써 충성맹서(忠誠盟誓)를 해야만 학위(學位)를 수여(授與)받고 졸업장(卒業狀)을 받을 수 있다.
천황(天皇)에게 충성맹서(忠誠盟誓)를 하는 것이 항일투쟁(抗日鬪爭)인가?
또, 그의 추종자(追從者)들은 그가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든 것을 한글운동(運動)으로 떠받들고 있으나 그것은 한글운동(運動)이 아니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묵인(黙認)아래 실행(實行)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파괴운동(破壞運動)이다.
하기야 훈민정음(訓民正音) 파괴(破壞파괴運動)도 운동(運動)이라면 운동(運動)이라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1911년에 만든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대신에 <언문철자법>이라는 것을 다시 만들었는데 그때 외솔은 오꾸라신뻬이(小倉進平)와 자신의 은사(恩師)인 다까하시데이(高橋亭)와 손발을 맞추어 훈민정음(訓民正音) 파괴(破壞) 작업(作業)에 참여(參與)하였다.
수년 만에 은사(恩師)와 동등(同等)한 입장(立場)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은 얼마나 감개무량(感慨無量)하였을까?
더구나 평소(平素)에 존경(尊敬)하여마지 않는 신(神)과 같은 존재(存在)인 오꾸라신뻬이(小倉進平)와 무릎은 맞대고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신임(信任)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證據)이다.
이 훈민정음(訓民正音) 파괴(破壞) 작업(作業)에서 일부(一部) 뜻있는 조선학자(朝鮮學者)들의 반대(反對)로 일부분(一部分) 표음주의(表意主義) 방식(方式)이 채택(採擇)되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완전(完全)히 파괴(破壞)되지 않자 외솔은 이에 불만(不滿)을 품고 그의 동조자(同調者)들을 이끌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무대(舞臺)를 옮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일본(日本) 글자와 똑같이 표의주의(表意主義) 방식(方式)인 형태주의(形態主義)를 채택(採擇)함으로써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아주 완벽(完璧)하게 파괴(破壞)하였고 이것을 「한글」이라고 부르기 시작(始作)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신봉자(信奉者)들이 주장(主張)하는 외솔의 한글운동(運動)이라는 것이다.
하기야 세종대왕(世宗大王)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정신(創製精神)을 말살(抹殺)하여 소리를 적는 표음문자(表音文字)를 뜻을 적는 표의문자(表意文字)로 변질(變質)시켜 놓았으니 운동(運動)이라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체계(體系)에 대한 본질(本質)을 바꾸어 「한글」이라는 체계(體系)로 만들었으니 한글운동(運動)을 한 것만은 틀림이 없겠다.
또한 그의 추종자(追從者)들은 그가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감옥살이를 치른 것을 항일운동(抗日運動)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은 항일투쟁사건(抗日鬪爭事件)이 아니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하여 말살정책(抹殺政策)하기 위해 꾸민 조작극(造作劇)이다.
그의 추종자(追從者)들은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을 마치 대종교(大倧敎)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는 것처럼 조작(造作)하며 그를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로 둔갑(遁甲)시키고 있는데 그 사건(事件)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하여 우리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强要)하면서 우리말과 글을 말살(抹殺)하려고 꾸민 정치조작극(政治造作劇)이다.
만약(萬若)에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이 그의 추종자(追從者)들이 말하는 것처럼 항일투쟁(抗日鬪爭)이었다면 외솔뿐만이 아니라 일석도 함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도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였었다는 것이 된다.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지독한 고문(拷問)으로 옥사(獄死)하신 분도 계시는데 이런 분은 평소(平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책(政策)에 비협조적(非協調的)인 인사(人士)로 지목(指目)되어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사람이라 심한 고문(拷問)을 당하여 결국(結局) 옥사(獄死)하게 되었으나 외솔과 일석은 그런 분들과는 달리 비교적(比較的) 편안한 옥살이를 한 것으로 예상(豫想)된다.
그 이유(理由)는 외솔이나 일석이 광복(光復) 후 수명(壽命)을 다 할 때까지 한 번도 고문후유증(拷問後遺症)으로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며 왕성(旺盛)한 체력(體力)으로 천수(天壽)를 누렸다는 것을 보면 짐작(斟酌)할 수 있는 일이다.
외솔과 일석은 모두 제국대학(帝國大學) 출신(出身)으로 오꾸라신뻬이(小倉進平)의 손발이었으므로 그다지 악독(惡毒)한 고문(拷問)은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외솔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부터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고 있지 않았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광복(光復) 후 그는 두음법칙(頭音法則)이라는 엉터리 법칙을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반설음(半舌音)인 ㄹ의 첫소리를 없애버림으로서 일본(日本)말을 우리말로 위장(僞裝)하면서 철저(徹底)하게 일제(日帝) 식민교육(植民敎育)의 씨앗을 뿌렸다.
料理의 우리 독음(讀音)은 [료리]이고 일본(日本) 독음(讀音)도 [りょうり(료-리)]로 우리 독음(讀音)과 아주 똑같은데 이것을 [요리]로 발음(發音)하도록 하여 국민들에게 [요리]가 우리말인 것으로 알도록 오도(誤導)하였다.
이렇게 일제(日帝)의 식민교육(植民敎育)의 씨앗을 뿌리며 우리의 고유(固有) 국문학(國文學)의 싹을 잘라버린 행위(行爲)가 과연 나라를 위해서 일한 자(者)로 칭송(稱頌)을 받을 일인가?
우리나라를 강탈(强奪)한 자(者)들로부터 돈을 받고 공부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자(者)가 오늘날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로 추앙(推仰)을 받으며 거기에다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까지 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외솔의 외침이 "한글은 목숨이다."라면
나의 외침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목숨이다!"

정음 연구회
회장 최 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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