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역사는 반복된다.

검토 완료

박성연(history7)등록 2013.01.14 15:37
고전이 왜 고전인지 알려준 영화

'레미제라블'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장발장의 이야기이다. 필자는 처음 '레미제라블'이 개봉 했을때 보아야 겠다는 흥미가 들지 않았다. 원작을 아는 상태에서 보는 영화가 기대를 충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후에 필자는 생각이 바뀌었는데 이 평론은 사실 영화에 대한 평론이라기 보다는 '레미제라블'자체에 대한 평가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 같다. 그만큼 이 평론은 '레미제라블'을 본 개인적 소회에 가까운 글이다.

1.혁명 이후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왕정이 복고된 시대로 부터 시작한다. 왠지 분위기는 다시 왕정이 복고 되어 중세적 문제점들이 전면에 등장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처음 이야기를 천천히 살펴보자.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은 5년 형을 받고, 탈옥을 하다 실패하여 총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객관적으로만 보자면 사정이야 어떠하던지 간에 절도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니 법의 심판을 받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배고파 죽어가도 절도 말고는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 문제와 법의 집행에 있어서 정도이다. 만약 5년 형이 아니라 1주일 정도의 구류였다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영화는 오히려 사회적 모순과 이 모순을 감추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엄격한 법의 집행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문제는 시작은 왕정복고 시대이지만 장발장이 감옥에 갈 때는 혁명 직후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혁명이 실제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2.인간은 어떻게 구원 받는가?

장발장은 가석방 이후에 일자리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에서 세상을 외면한다. 그 결과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던 신부조차 배신하고 은식기들을 훔치다가 발각된다. 반전은 여기에서 일어난다. 신부는 그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촛대마저 내어줌으로써 장발장을 구원으로 이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톨릭이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이 장면은 신부 개인의 역량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굉장히도 종교적인 장면이다. 신부님 자신도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하는 일임을 밝힌다. 하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아이러니였는데 중세의 해체는 종교적 세계관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적 세계관으로의 변동이지만 결국 인간의 구원은 중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의 세계관의 반영일 수도 있다. 가끔 우리는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기가 쉽다. 예를 들어 우리 근대에서 가장 유명한 개화파 중에 한명인 유길준의 유명한 저서 '서유견문'에는 외국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면서 입헌군주정이 가장 합리적인 제도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대통령제는 굉장히 위험한 제도로 평가한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왜 왕이 없는 것이 불안한가. 더구나 개화파라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는 왕정체제인 조선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우리처럼 대통령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미국의 대통령제는 당시에는 엄청난 정치적 실험이었던 셈)

하지만 현재적 입장에서도 이 메시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로 종교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면 종교는 소멸해야 옳다. 그러나 현재도 종교의 영향력은 우리사회든 외국이던 가리지 않고 큰 편이다. 물론 현세보다는 내세를 강조함으로써 위안을 가장한 체념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음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정의구현사제단 같이)

3.산업화의 뒷모습

새 사람이 된 장발장은 작은 도시에서 사업으로 성공하여 시장에 까지 오른다. 여기에서 초점은 일시적으로 판틴으로 옮겨 간다. 판틴은 미혼모로 자신의 딸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지만 동료들의 질투로 쫓겨나서 결국 사창가로까지 가게 된다. 장발장은 뒤늦게 이를 알지만 결국 살려내는 데는 실패하고 대신 그녀의 딸 코제트를 위해 남은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근대는 노력하는 사람은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이 통용되지만 이는 극소수의 일부에 불과하다. 장발장은 그러한 극소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판틴이나 그의 동료들처럼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하나 의문을 가지게 된다. 중세의 농민들이나 근대 산업화 이후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혁명이 모든 것을 바꾸어 줄 것으로 믿었지만 현상은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아니지만 미국의 유명한 TV시리즈인 <남과 북>에서 북부 출신의 사업가 집안의 주인공이 노예를 부리는 남부 지역 주인공에게 노예 제도를 없어져야 할 제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남부 출신 주인공이 북부 출신 주인공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며 오히려 노예들 보다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남부 출신 주인공은 인간적이라 노예들을 잘 대해주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주인들이 그렇게 노예를 대하는 것이 아니기에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혁명이 가져다 준 자유, 그리고 산업화가 과연 모두를 위한 것인가 아님 소수를 위한 것이었나를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4.개인적인 구원은 결국 전통적인가?

판틴이 그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원인은 나쁜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선택했던 남자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조롱하거나 혹은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전은 극후반부에 나온다. 코제트가 열혈청년이자 귀족 집안의 자식인 마리우스와 첫눈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결국 이를 이어주기 위해 장발장은 자신은 혁명에 관심도 없지만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혁명의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장발장이야 극의 표현대로 하느님에 의해서 새로 태어난 후 새 삶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코제트를 사랑하고 지켜낸다 하더라도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개인적인 행복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아서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내 눈을 끌었던 건 혁명을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의 결론은 마리우스는 부자이자 귀족인 할아버지에게 돌아가고 귀족의 칭호를 받고 코제트와 결혼하게 된다. 즉 코제트 입장에서는 사랑하기도 하지만 결국 귀족이자 부자의 부인이 되어서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구조이다.

이는 결국 혁명이라는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인적인 행복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이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한계일 수도 있고, 더 나은 대안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이 본질적으로 갈구하는 것이라 읽을 수도 있다.

5.흥미를 끄는 주변 인물들 1 - 자베르 경감

'레미제라블'에서는 장발장 말고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 우선은 또 하나의 주연이라도 볼 수도 있는 자베르 경감이다. 그는 결국 장발장에게서 용서를 받고도 정체성의 혼란으로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데 처음에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다. 장발장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이나 자신으로 인하여 죽나 결과적으로 무엇이 다를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만약 장발장 입장에서 자신 때문에 죽은 걸 알아도 전혀 죄책감이 없을까?)

하지만 이 인물은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항상 국가와 법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헌신한 인물이다. 심지어 장발장이 시장이어도 국가와 법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는다. 극중에 중요한 대사가 있다.

자신은 감옥에서 태어나 자라서 죄인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내용이다. 이는 지나가듯이 나오지만 왜 그가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즉 한번 나쁜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감옥에 넣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고, 장발장으로 인해서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그는 결국 평생을 지탱해온 자신의 가치관이 붕괴하자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콜베르는 사실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도 많은 사람이다. 그의 행동은 절대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 집행이 시장이던 일개 시민이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집행에 있어서 강자처럼 보이는 사람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자신이 생각하기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문제점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공직자로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던지 들을 수 있는 귀만 있다면 이상적인 공직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은 오히려 옳아 보이는 잘못된 신념을 가진 공직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는가 역시 함께 보여준다. 만약 판사가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서 소신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어떨까? 사실 공직자는 처음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기계적인 일상을 반복하다가 보면 의외로 자베르처럼 잘못에 빠지기 쉽다.

가끔 기사에서 노인들에게도 반말로 호통을 치는 판사들이 이슈가 되기도 하지만 실제 재판장에 가보면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우리의 예상보다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과 계속 상대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위압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또한 법이 항상 진리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는 첩의 자식은 공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지금 입장에서는 굉장히 비이성적인 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법이 처음 생겼을 때는 오히려 권력자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첩을 두는 것을 막아서 사회적 모순을 줄이고 유교적 이상 사회에 가까이 가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처음의 이상은 온데간데없고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제한하는 기능만 남았다.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법의 이와 같은 속성이다. 법이 처음 의도는 어떠하던지 세월이 지나서도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법의 집행은 그 입법의도를 고려하여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법 그 자체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가 너무 먼 이야기라면 가깝게는 유신헌법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 시대에도 경찰이나 군인들은 법에 따라서 명령에 따라서 공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문을 가한 경찰이 떳떳하게 말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이해할 수 없어도 그는 법을 수호했다는 굳은 신념에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공직자는 법 그 껍데기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콜베르 경감은 보여주고 있다.

6.흥미를 끄는 주변 인물 2 - 여관 주인 부부와 에포닌

장발장도 어떤 면에서는 자본가가 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더 극단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여관 주인 부부이다. 이들은 그의 여관에 오는 사람들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뺏고 제공되는 서비스는 알 수도 없는 정체불명의 고기들로 소세지를 만들어서 내어 놓고, 대신 맞은 코제트를 학대하면서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려고 한다. 심지어 혁명의 국면에서도 그들은 혁명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혁명에 참가한다. 가장 자본주의적 인간이면서도 가장 자본주의의 추악함을 보여주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그의 딸인 에포닌은 마리우스와 코제트와는 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자신은 사랑하지만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마리우스 현대극이라면 둘 사이를 이간질 하는 악녀로 등장할 법 하지만 이 어린 소녀는 그 둘을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죽게 된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캐릭터인 셈이다.

7.흥미를 끄는 주변 인물 3 - 열혈 청년들과 민중들

열혈청년과 민중들 아마도 일반적으로는 열혈청년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외면하는 민중들에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른 관점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싶다. 먼저 열혈청년들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들의 용기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들에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꿈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부패한 권력자만 끌어내린다고 세상이 바꾸지는 않는다. 심지어 이 소설이 된 시대는 이미 루이 16세가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국왕이 죽었다고 대중의 삶이 크게 나아졌던 것은 아니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이미 겪은 이후에도 그저 뒤집어엎고 보자는 식의 혁명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가에는 의문이 들었다.

반면에 민중들 영화만 보면 열혈청년들을 외면하는 민중들이 안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불과 얼마 전에 루이 16세를 기요틴으로 보냈던 그 민중들이다. 바뀌지 않는 세상에 다시 혁명에 응원을 보내기에는 이들의 삶은 고달프고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오며

영화를 보며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는 바뀐 현대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경험으로 돌아가 보자. 혁명까진 아니지만 87년의 체제는 우리에게 형식적이나마 자유와 평등을 주었다. 그 뒤로 정권교체도 해보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빈부격차는 더 커지고 일반 대중들의 삶이 얼마나 더 좋아졌는지는 의문이다. 레미제라블의 시대의 프랑스와 우리의 지금이 묘하게 닮아있다. 답이 없을 것 같은 현실이지만 알고 보니 우리와 비슷한 길을 갔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역사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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