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으로 게으를 수 있는 삶

지역인문잡학덕후의 개똥 인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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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ericrow)등록 2012.12.24 12:00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성실, 정직, 화목을 강조하셨고 그게 우리집 가훈이다. 그 중에 제일은 성실인데, 이는 부지런함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일찍 일어나시고, 열심히 일하시고, 돈도 꽤 모아두셨다. 그런데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빚보증으로 아버지는 재산을 다 날리시고, 그때부터 우리집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우리집은 이사를 자주 다녔고, 빚 독촉에 시달렸다. (정말 고생 많이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게 아니니 패스.)

그 시끄럽고 심란한 시절에 나의 구원은 영화와 라디오였다. 운좋게 영화 초대권을 매주 얻어오는 쌀집 아들과 친했던 까닭에 나는 돈 안 들이고 '시네마 천국'에 발을 들이는 헐리우드 아니 홍콩 키드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 돈 안드는 '라디오 데이즈' 시절을 보냈다. 임국희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FM영화음악 애청자였다.

아무튼 영화는 신산한 내 어린 시절에 활력소임에 분명했다. 그때 좋아했던 부류는 대개 무협영화와 홍콩느와르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억울하게 잃은 주인공이 무림고수를 찾아가 피나는 수련 끝에 고수가 되고, 결국 원수를 갚는다는 단순한 스토리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아버지의 성실과 아무런 부딫힘 없이 만날 수 있고 즐겁기까지 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며 '남자는 실력이 있고 강해야 한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와 같은 생각들을 했다.

그러다 마추친 뭔가 달랐던 무협지 소오강호(笑傲江浩). 이 무협지의 주인공 영호충은 고아인데, 아버지와 같은 사부에게 배신 당하고, 사람들을 도와주다 죽을 병에 걸리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겪고, 또 갖은 유혹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대의를 지키고 참 즐겁게도 산다. 부러울 정도로.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도 하는 해피엔딩까지.

다음에 마주친 뭔가 더 다른 것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었다. 대부분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문체의 명랑함과 즐거운 때를 나열하는 글 중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도 안 아픈 척 하지 않고 실컷 욕하는 때'(정확하진 않다. 찾아보는 수고를 하려다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이대로 적는다.)를 거론하는 부분이다. 착한 척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하는 여유를 느꼈다. 인격 수양이 덜 되었다고 공자가 다그칠지도 모를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어쩐지 끌렸다. 그 여유가. 이젠 사는 게 팍팍할 때 다시 돌아보는 책이 되었는데 아마도 여유를 찾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어쨌든 그 전까지 아니 이글을 쓰는 지금도 어쩌면 여전히 인생을 비극이라 생각하고, 해피엔딩 따위는 믿지 않고 있다. 내 인생은 지금까지 비극의 시나리오를 따라 움직인 것 같다. '아버지는 부지런하신데 왜 가난할까?' '영화와 라디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왜 노는 거 같은데 부자지?' 등등의 생각과 이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이들을 이기려면 더 성실하게 살아서 이겨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고 여전히 부자들과 게으른 사람들이 이긴다는 이 불편한 진실. 이게 불편한 진실일 뿐 아니라 정말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약자와 동일시하고 그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 이 비극적 삶을 돌파하는 정직한 길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소오강호와 생활의 발견은 그런 나를 거만하게(傲) 비웃었다(笑). 아니 여전히 나를 거만하게 비웃고 있다.

최근 읽고 있는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쇼팬하우어&니체'를 읽으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정신의3단계 변화상을 알게 됐다. (조금 부끄럽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이제서야 공부했다는 것 자체가.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말자. 난 주체적으로 게으르니까. 그동안 알고 싶어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낙타. 사자. 어린 아이.

낙타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험난한 사막을 건너는 동물이다. 인간의 정신은 고뇌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삶이라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가 되어야 한다. 인내하며 비극적인 삶을 이겨내는 영웅적인 삶. 이것이 낙타의 긍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낙타는 타인에 의해 주어진 짐을 지는 자이다. 이제 낙타는 알고 싶어한다. 자신이 지고 싶은 짐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고. 사자는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지 않고 주인이 되려는 자이다. 그 정신의 주인은 용과 같다. 용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 용의 이름은 '마땅히 해야 한다'라고 한다. 칸트가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면 그가 용이다. 그 용과 싸워서 '나는 하고자 한다'를 외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용에게서 자유를 약탈해야 하므로 기꺼이 도둑이 되어야 한다. 자유의 도둑이. 그러나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는 자일 뿐 그 자유로 삶을 창조하는 자는 아니다. 이제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 아이는 삶을 긍정하고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저주와도 같은 삶을 사랑한다. 망각하고 사랑한다.

이제 내 삶을 되돌아 본다. 어린 시절의 신산함을 짊어지고 고통 받던 낙타와 같던 나는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법을 충실히 따르다가 고뇌를 주는 불평등한 현실에 맞서 사자와 같이 싸우다 알게 되었다. 문제는 성실하게 살려는 나 자신의 진지함이었다고. 그리고 내가 동경해 마지 않던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밝게 사는 영호충과 생활의 발견의 임어당 같은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길은 여기다. 주체적으로 게을러지는 것이다. 삶의 불평등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성실을 착취하여 게으르게 살 수 있는 자들을 밉다고 얘기하고 그들과 싸우기도 하되, 내 삶을 긍정하고 즐기고, 결국 모두가 게을러질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모두가 게을러질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길은 이미 버트란트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어느 정도 밝혀 주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이 뭐냐고 내게도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라고.  낙타도 되어보고 사자도 되어보라. 그리고 여유만만하게 웃어줘라.

'왜 사냐건 웃지요'의 나만의 버전이다. 유유자적하겠다. 주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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